나이 서른 중반,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나이 서른 중반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혹시 주변에 나처럼 느끼는 사람 없나? 나이는 서른 중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른이 된 것 같지 않다는 느낌. 물론 스무 살 때도 그랬고 스물다섯 살 때에도, 서른이 넘어서 그리고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까지. 내가 어른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살고 있다.
난 초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일하기(공부하기) 싫어하고, 여전히 노는 것이 좋다. 몇십 년을 주 5일 매일 같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 여전히 아침 알람은 5~6개를 맞춰놓는다. 아빠가 하지 말라는 밤에 손톱깎이를 하고, 엄마가 먹지 말라는 라면을 즐겨 먹는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누워서 핸드폰을 보거나 티브이를 보고, 데드라인에 쫓겨 결국 데드(dead)하거나 가까스로 통과하기도 한다. 여전히 엄마와 아빠는 내게 잔소리와 걱정을 늘여놓고, 여전히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보낸다.
내 친구들을 봐도 학창 시절 모습 그대로인 것 같고, 대화의 주제는 조금 바뀐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어른의 주제 같진 않다. 여전히 연예인 가십을 좋아하고, 동창생이 어떻게 됐다는 카더라 통신을 재밌게 듣는다.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고, 자가를 마련하고, 결혼도 했지만 내가 어른 같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바라봤던 어른 같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 내가 대학생 때 바라봤던 어른 같은 대학교 4학년 선배들, 내가 사회 초년 생일 때 바라봤던 어른 같은 대리님. 대학 신입생도, 대학 말년도, 대리님도 다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어른 같아 보이지 않는다.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되었다
어른 같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내가 강아지 모모를 키운 지 어언 5개월 차에 접어든 지금, 내가 어른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 끝나고 몸이 너무 피곤해도 하루 종일 기다리며 심심했을 강아지 모모를 생각하며 바로 산책을 나간다. 피곤하지만 한 시간 이상 산책을 하려고 한다. 늘어져서 티브이나 보고 핸드폰이나 끄적이고 싶지만 일어나서 모모와 터그 놀이를 해주고 숨바꼭질을 해주고 놀아주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아직도 지옥 같지만 출근하는 날이면 30분 일찍 일어나서 산책을 조금이라도 해주고 출근하려고 한다. 배변패드를 가는 일도, 밥을 채워 넣는 일도 편하지는 않지만 싫지 않다. 무엇이든 잘 주워 먹는 강아지이기에 걱정돼서 물을 끓여서 주는데, 이 조차도 하루를 거른 적이 없다. 강아지 사료와 간식이 비지 않게 곳간을 잘 채워 넣는다.
내가 이 강아지를 위해서 하는 일들이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르지 않고 매일 한다. 이 매일이 싫지 않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니 자식 낳아봐야 내 마음 알지'의 엄마들의 말씀처럼 사람 자식은 아니지만 강아지 자식에도 적용되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보고 자랐던 어른들은
우리 엄마와 아빠는 한 번도 내게 무엇을 해줌에 있어서 귀찮아하신 적이 없다. 30년을 함께 사는 동안 엄마는 내 아침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아침잠이 많은 내게 한 점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김과 밥을 싼 김밥을 3알 만들어 놓거나, 소고기 3점을 구워놓거나, 전복 몇 점, 콘후레이크 등등 엄마는 30년을, 매일같이 내 아침을 챙겨주셨다. 물론 함께 있는 한 점심과 저녁도 당연하다. 아빠도 말해 뭐하나. 나는 30년을 집에서 손발이 없이 살았는데(귀하게 자란 티가 전혀 안나지만...) 내 방청소는 항상 아빠 몫이었다. 주말에 내 친구들이 집에 오면 과일을 깎아서 대접하던 것도 아빠였고, 퇴근길에 "뭐 사갈까?"하고 통화하고 두 손 가득 치킨이나 과자를 사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적어도 우리 엄마, 아빠는 항상 그랬다. 당연시 여기던 이런 일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 른. 이기에 가능한 것들인 것 같다.
어른은 적어도 나의 귀찮음이나 힘듦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게 어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맛있는 건 꼭 내가, 그리고 내가 제일 많이 먹고 싶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양보를 한다. 어린 아이와 함께 있으면 굳이 내가 맛있는 걸 먹지 않아도 괜찮고 아이에게 다 양보한다. 내 다리가 아파도 어린 아이나 노인, 임산부가 있으면 자리를 양보한다. 주니어보다 시니어가 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억울하다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다.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어. 른. 의 룰이다.
저를 어른으로 키워주신
제 어미는 강아지입니다.
이제야 나의 일상을 돌아보면, 나는 어른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어른이었다. 적어도 어른으로 (조금은?) 잘 랜딩(!) 중에 있는 것 같다. 일단 내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을 매일 잘 지고 있다. 이 아이가 아파서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을 쓰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지불할 것이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 시간도 당연히 내어줄 것이다. 그 무엇이 아깝지 않을 만큼 내 책임 아래 있는 아이라는 생각을 한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다시 태어나면 만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현생에서는 내 반려인을 잘 케어하려고 노력한다. 귀찮지만 내 집이기 때문에 청소하고 보수한다. 회사에서 주말 출근을 하더라도 억울하지 않다.(이건 세대차이도 있겠지만) 적어도 젊은 친구들은 주말에 많이 놀아야 하니 나이가 더 많은(시니어인) 내가 주말 출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야근을 해야 한다거나, 일을 더 해야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내가 한다. 남들이 싫어하는 일은 내가 하려고 한다. 친구들 모임을 할 때 아이가 있는 친구 기준으로 움직이는 것이 화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어른이 아닐까.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부모에게 조르는 아이, 하지만 막상 강아지를 키우면 그 강아지 케어의 모든 몫은 어른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강아지 키우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당연한 것이다. 어른만이 누군가를 책임지고 케어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게 어른의 룰인 거니까. 아이를 원망해서도 안되고, 강아지를 키운다면 내 책임하에 있는 아이가 원해서이기에 그 또한 감내해야 하는 것이 어른이다. 그리고 키우기 시작하는 순간 강아지도 내 책임 하에 놓이는 것이다.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를 느끼는 순간.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내가 어렸을 적 바라봤던 언니, 오빠, 선배, 대리님 등의 어른의 모습으로 내가 되었을 것만 같으니깐. 적어도 몇 명쯤은 내가 그들을 바라봤던 것처럼 나를 어른이라고 바라볼 테니까. 이렇게 강아지는 내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어른이 된 지 십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던 걸 강아지가 가르쳐 준다. 고마워요 나의 엄마, 강아지 모모야. 어른으로써 널 평생 책임져 줄게. 걱정 마. - 어른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