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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Feb 24. 2019

#11. 일상에서의 회복을 위한 백수 생활 정리

일상에서의 회복을 위한 백수 생활 정리

지금 이 백수 생활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잠깐의 여행이,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보는 것이 삶의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을 텐데. 회사를 다니며 제일 아쉬운 것이 무엇이었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회사는 그냥 저냥 잘 다니고 있는데, ‘회사 밖에서의 나’를 잘 돌보지 못했던 것. 그것이 제일 아쉬웠다. 오롯이 나로서 있는 시공간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대신 회사와 일 생각을 하며 감정과 에너지, 시간을 엄청나게 소모했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일상에서의 회복. 내게 필요한 건 그것이었다. 그래서 2월 한 달은 가만히 집에 있기로 했다. 집에서 나만의 일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무얼 하면서 지내냐고? 별거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지만 나에게는 소소하고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그것을 시간대 별로 정리해보았다.


아침 9시, 회사 다닐 때 이 시각이면 출근하고, 업무를 시작했을 시각이 이젠 나의 기상 시간이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라디오를 켠다. 아, 요즘은 라디오마저 잘 켜지 않는다. 멍 때리는데 방해가 되어서 :) 그리고 나서는 바닥에 앉아 스트레칭을 한다. 목을 풀고, 손목을 풀고, 어깨를 풀고 하는 식이다. 30분 정도 스트레칭을 한다. 회사 다닐 때는.. 기지개를 켜는 것 말고는 무얼 할 시간이 없었다. 출근 준비하기 바쁜데, 스트레칭이라니 생각도 못했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은 뭐 먹지?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어젯밤 꿈이 뭐였지? 회사를 그만 두니 꿈도 다양하게 꾸네. 뭐 이런 생각들.


9시 30분, 스트레칭을 하고 나면 담배를 한 대 피고 바로 씻는다. 회사 다닐 때 공휴일이면 씻지 않고 자고 일어난 모습 그대로 하루를 보냈는데, 아침에 씻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이 깨고, 좀더 일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고나 할까. 엣헴,,


9시 50분, 씻고 나면 화장품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는 일 따위를 하고 차를 내린다. 차를 준비하고 책상 앞에 앉아 오늘 혹은 어제 생각했던 것을 일기로 짧게 정리하는 것, 오늘 해야 할 일을 리스트업하는 것이다. 대단한 것은 별로 없지만 나에게 중요한 일들을 정리한다.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 것인지, 무슨 영화를 볼 것인지, 공병 정리나 손톱 손질 같은 것들. 회사를 다닐 때는 오늘 해야 할 일이 모두 회사 업무로만 리스트업 되었는데, 지금은 모두 다 나에 관련된 것들뿐이다.


10시 20분,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회사 다닐 땐 스프나 소시지 정도로 대충 아침을 챙겼는데, 이젠 아침도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다. 배달 음식을 끊기로 마음 먹어서 웬만한 것들은 만들어 먹는다.


12시쯤 되면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한 잔 준비한다. 시간대 별로 해야 할 일을 정해 놓고 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하는 것들이 정해져 있다. 캘리 연습, 영어 공부, 책 읽기, 글쓰기 같은 것들. 캘리는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들이 쓴 것을 보고 베껴 쓰는 일을 반복해서 한다. 손이 아프긴 하지만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영어 공부는 취업이나 이런 걸 위해서 한다기 보다는 여태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한 적이 없어 토익 점수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다. 책 읽는 건 집에서 독서 앱이나 가지고 있는 책을 이용하기도 하고, 집 근처 서점에서 읽다 오기도 한다. 글은 보통 일기장에 쓰는데, 요즘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해놓는 수준이다.


이런 것들을 하고 나면 다시 배가 고파오는데, 점심은 좀 대충 먹는 편이다. 라면이나 토스트, 만두, 과일 같은 것을 챙겨 먹는다. 그리고 나서 이런 것들을 다시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진다. 저녁 7-8시가 되면 다시 요리를 시작한다. 식사 준비라기 보다는 술상을 준비하는 것에 가깝다. 회사를 다녔더라면 퇴근하고 저녁을 먹었을 시각이다. 퇴근 후에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건 꽤나 신경질적인 일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와중에 배가 고파서 급하게 준비하는 식사였기에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조급한 마음으로 밥을 차리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로워서 육수를 만드는 데나 어떤 재료를 불리거나 손질하는 데 시간을 꽤나 쓰는데도 마음이 여유롭다. 요리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더 준비하는 것이 있다. 무슨 영화를 볼지 정하는 것. 저녁 식사이자 영화를 보는 시간이자 맥주 한 잔을 하는 시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나 좋아했던 영화를 다시 보기 하면서 밤을 보낸다. 이 시간을 참 좋아한다. 이 밤을 보내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11- 12시. 침대에서 책을 보거나 기도를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약속이 없는 날, 나의 일상을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별 것 아니지만 이렇게 지내 본 적이 없어서 내겐 너무 별 것인 일상. 가끔은 이런 일상이 눈물 날 정도로 감격스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영영 이러는 거 아닌가, 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내겐 너무 소중한 일상. 깨뜨리고 싶지 않는 이 반복되는 일상. 일상에서의 회복을 위한 반복이기에 오늘도 잘 지내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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