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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

겨울옷을 정리하고 나서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이 비로소 찾아왔다

by 백수쟁이

해는 갈수록 길어지고 뜨거워지는데, 여전히 긴팔을 입고 출근했다. 한참을 미뤄온 겨울옷 정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엔 꼭 해야지 다짐했지만, 어느새 5월이 훌쩍 넘어 있었다. 겨울 옷 정리 대신 아침마다 여름옷이 담긴 박스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퇴사하면 뭐 할 거야?’ 친구가 물었다. 부럽다는 듯 반짝이던 눈은 내가 ‘겨울옷 정리’라고 답하자 금세 시시하다는 듯 식어버렸다.


퇴사 후 첫 월요일 남편이 출근한 뒤, 옷장의 겨울옷을 다 밖으로 꺼냈다. 먼저 버릴 옷을 골라냈다. 몇 번 입지 않은 거의 새 옷이어서, 언젠가는 입을 옷이어서, 딴에는 거금을 주고 산 옷이어서 최근 몇 년간 입지도 않았으면서 겨울이면 꺼냈다가 봄에 집어넣기를 반복하던 옷들이 큰 봉투로 세 봉투가 나왔다. 여름옷도 꺼냈다. 겨울옷을 만지다가 여름옷을 만지니 확실히 가벼웠다. 옷장에 여름옷을 걸고 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겨울옷 정리에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그동안 미룬 걸까. 한 시간 정도면 되는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았던 걸까. 하긴, 정말 그랬다. 매일같이 쓰던 불렛 저널을 4월부터는 펼쳐 보지도 않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내 몸을 씻기는 것도 버거워 겨우 겨우 해냈으니까. 매일 아침 체중계에 올라 몸무게를 체크하는 것마저 귀찮고, 매일 밤 양치를 하는 것도 무용해 보이던 시기를 지내고 있었느니 겨울옷 정리에 엄두가 안 날 수밖에. 당시 나는 자연스러운 계절의 변화도 버겁기만 했다.


퇴사한 뒤 겨울 옷을 정리하겠다는 건 일상을 되찾고 싶다는 뜻이었고, 계절에 맞게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비워내고, 내게 필요한 것들로 필요한 만큼만 채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내게 한 뼘의 여유도 내어주지 않는 일상을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퇴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회사인의 옷을 완벽하게 벗은 것 같다. 예전엔 퇴사하고 공허함을 좀 느꼈는데, 지금은 전혀 없다. 한 번도 회사를 다녀본 적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알람 없이 아침에 일어나 몇 가지 아침 루틴을 끝내면 남편이 일어난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글을 쓰거나 읽으면서, 그러다 보면 오전이 훌쩍 지나 점심을 챙긴다. 오후엔 책상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청소도 하고, 산책을 하거나 도서관에 가고, 동네 마트도 괜히 다녀와본다. 그러면 또 금세 저녁이 되어 퇴근한 남편과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겨울옷을 정리하고 나서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이 비로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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