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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자의 고요한 사치

여러 일을 끝내고도 아직 아침이라는 사실에 이 단어가 떠올랐다.

by 백수쟁이

새벽 기상은 오랜 나의 염원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 매일 같이 시도했고 매일 같이 실패하고는 내일은 꼭 새벽에 일어나야지 다짐했다. 몇 년째 핸드폰 알람은 다섯 시 반에 설정돼 있지만, 그 시간에 일어난 건…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나지 않는다.


퇴사를 앞두고 앞으로의 일상을 생각하며, 새벽 기상을 나는 포기했다. 원래도 잠이 많기도 하고, 여태껏 아침에 일어나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실컷 잠이라도 자보고 싶어서. 그래서 핸드폰의 모든 알람을 껐다. 몇 분 주기로 설정된 십여 개의 알람을 다 꺼버렸다.


그런데 새벽 여섯 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일찍 눈이 떠질 때는 새벽 다섯 시였다. 좀 당혹스럽더라. 알람도 없는데, 회사 다닐 때도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건 행운 같은 일이었는데, 그 행운이 매일 찾아왔다. 운동으로 피곤한 날에도, 여행지의 낯선 숙소에서도 다음 날 새벽이면 눈이 떠졌다. 신기한 건 눈을 뜨고 나면 다시 잠들지 않는다는 것. 예전엔 단 오분이라도 더 자겠다고 눈을 질끈 감기 일쑤였고, 종종 남편을 먼저 깨워 떠밀고는 잠을 청했는데.


신기한 건 또 있다. 늘 그랬다는 듯 새벽 시간을 규칙적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씻는 것이다. 세안을 하고는 선크림까지 바른다. 다시는 눕지 않겠다는 의지와 어떤 외출에도 귀찮아하지 않고 휘리릭 가볍게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그 뒤, 차를 한 잔 내린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모닝 페이지를 쓴다. 오래전부터 시도해 온 건데, 올해 들어서는 한 달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했던 모닝 페이지. 매일마다 쓸 말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바닥 잡생각을 쏟아내고 나서야 펜을 놓게 되니까.


다 쓰고 나면 몇 가지 짧은 루틴을 이어간다. 기도하기, 불렛 저널 쓰기, 필사, 감사제목 쓰기 등등. 그 뒤로는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른 일상을 이어간다. 매트를 펼치고 요가나 스트레칭을 하거나 공원 산책을 다녀온다. 종종 이것들을 건너뛰고 아침을 챙기기도 한다.


퇴사자의 고요한 사치. 여러 일을 끝내고도 아직 아침이라는 사실에 이 단어가 떠올랐다. 어제 친구가 너는 월요일에 출근 안 해서 좋겠다는 말에 웃어넘겼는데, 진짜 좋은 건 이거였다. 알람 없이 일어나는 것. 눈 뜨자마자 출근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나의 호흡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나에게 몰입하는 것. 회사를 다니며 시도했지만 못 하던 것을 퇴사하고 자연스럽게 이루고 고요하게 누리는 것.


언젠가 또 조직에 들어가게 될지 혹은 다른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새벽 시간을 잘 다져야지. 이 고요한 사치를 오래오래 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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