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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머무는 공간이 달라졌다.

회피의 공간에서 회복의 공간으로.

by 백수쟁이

자기 전까지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은 어디인가.


거실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3인용 소파와 큰 티브이가 놓인 거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퇴근 후 기운이 없을 땐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숨만 쉬는 시체처럼 가만히. 더 이상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 때쯤이면 밤 아홉 시가 지나 있더라.


거실 앞 티브이는 현실을 빠르게 도피하게 하는 비상구였다. 유튜브가 제안하는 콘텐츠를 선택만 하면 너무 쉽게 다른 세계로 빠질 수 있었고, 현실을 잊게 했다. 영상 하나를 켜두면 자동 재생 기능 덕에 다음 콘텐츠는 고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게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장치인 줄은 모르고.


언젠가부터 밥도 거실에서 먹었다. 유튜브 봐야 하니까.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대화보다는 한 곳을 바라보며 영상을 시청하는 게 쉬는 기분이 들었다. 음식 맛도 콘텐츠도 어느 하나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배는 부르고 시간을 잘도 지나갔다.


이러다 내일 늦잠 잘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까지 거실을 떠날 줄 몰랐다. 퇴사 후에도 이런 일상이 계속될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지금은 ‘멀.컬.룸이라고 이름 지은 방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 가장 큰 방으로, 책상과 책장이 놓여 있다. 이사할 때 이삿짐센터 아저씨도 집주인 할아버지도 여긴 침실로 쓰기 좋겠다고 했지만, 남편과 나의 생각은 달랐다. 큰 방을 잠만 자는 데에 쓰기엔 아까웠다. 멀컬룸은 멀티 컬처 룸을 줄인 건데, 이 방에서 다양한 취미와 문화생활을 해보자는 우리의 포부였다. 하지만 퇴사하기 전까지 여기서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한 시간 이상 머문 적도 없었다.


이제는 이곳에서 아침마다 모닝 페이지를 쓴다. 불렛 저널 정리도 독서도 여기서 한다.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는 지금도 멀컬룸에서 하고 있다. 이 방엔 에어컨이 없어 더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집이 시원한 덕에 선풍기만 약하게 틀어놔도 하루 종일 시원하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 방이 더울 거라고만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제야 이 방을 찾게 된 건지 말이다. 이 방은 늘 그대로였는데, 예전엔 왜 이리도 방에 들어올 생각을 못했을까. 거실과 이 방의 차이에 답이 있었다. 내게 거실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는 곳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거나 티브이에 빠져들어 나를 외면하게 하는 공간. 이 방은 정반대이다. 나를 돌아보며 회복시키는 공간이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나의 생각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책 속에서 나를 빗대어 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나의 오늘을 감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퇴사 전에는 나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고, 이제는 나에게 집중하고 싶어서 자꾸만 이 방에 머무나 보다. 글 쓰기를 잠깐 멈추고 방 입구에서 이 방을 둘러 보았다. 초록을 좋아해 곳곳에 초록색 아이템을 두었다. 시아버님의 손길이 담긴 탁자와 그림은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책상이 너무 커서 이사할 때마다 짐 같았는데, 이제는 너른 책상 따라 너른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이 공간이 새삼 좋다. 초록색 아이템들 사이에서 나 역시 푸릇푸릇해지고 있다. 다시 지치고 무너지는 날이 오더라도, 거실에서 회피하는 게 아니라 이 방에서 나를 회복시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서 나를 단단히 키워야겠다


책상 앞에 앉아 옆을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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