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긍정마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 스테판 에셀
프랑스의 국민적 레지스탕스로 추앙받는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라는 책이 있다. 꽤 잘 팔렸던 서적인데, 촉촉한 감성의 소유자들에게는 읽기힘든 [선동적인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나같은 “분노형 인간”에게는 피가 끓는 듯한 깨달음 준 서적이 되었다. 큰 깊이는 없고 분량도 짧지만 “분노”의 순기능을 이렇게 잘 표현한 책을 찾기 힘들다.
“인간은 분노로 성장한다.”
분노없이 성장하고 쟁취했다? 사회가 만든 프레임에 길들여진 사육된 삶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사회가 만들어놓은 개인을 가스라이팅하는 프레임(교육, 관행, 종교, 기타[사주팔자, 혈액형, MBTI, 셀럽들의 마케팅]…)에 반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나만의 생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나이스(nice)함만 추구하는 사회”
불만스럽게도 이 땅의 민중들은 타인의 눈에 나이스하게 보이기 위해 인생을 갈아넣는다. 그러다보니 [나이스 is 예의]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이스하게만 보이려다보니 예의(禮意)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예의(禮意)는 서로의 분노를 삭히고 공격성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였다. 어느시점에서 변질되어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으로 둔갑해버렸다. “갑을관계” 개념이 강하다보니 희생을 예의로 강요한다. 그러니 사회모든 분야에서 “착취”가 일어난다. “돈”의 흐름에 따라 “낮은 곳”의 분노는 “나이스하지 못함”으로 치부해버린다.
…
딸내미가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검은색 옷을 입고 “왜 입고왔는 지 설명”했다고 했다. 그리고 가까운 곳이기에 선생님들과 같이 방과 후 추모한다고 했다. 나의 늦둥이 딸내미는 지금 사춘기 학생이지만 그 선생님은 내 고등학교 친구들의 딸과 같은 나이이다. 그리고 이번에 유명을 달리한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이기도 하다.
그 연배의 선생님이 느끼는 분노가 어떨지는 모른다. 예측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분노해야 할 때임은 안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스함을 보이지 않더라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안다.
“모두가 입을 닫고 들을 시간”이다
우선 발언권은 그들에게 있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