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관음 Feb 15. 2020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에서 라메쉬로, 또 웨인 리쿼만으로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에서 부터 이어지는 아드바이타 가르침

웨인 리쿼만(Wayne Liquorman)은 나의 공식 스승이다. 난 웨인을 공식 스승이라고 부른다. 처음 만남에 스승이 되어 달라고 직접 물었고 그러겠다는 답을 들어서다. 그 이후로 11년간 그의 발아래서 가르침을 받았고 찾음이 끝났다. 찾음이 끝난 이후도 여전히 스승을 찾아본다. 라메쉬가 웨인에게 그러하듯, 웨인도 나에게 그런 스승이다. 한국에는 여전히 낯선 나의 공식 스승 웨인 리쿼만을 소개한다.

웨인 리쿼만 (Wayne Liquorman)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라메쉬 발세카에게 아드바이타 가르침을 잇게 했다. 라메쉬 발세카는 같은 방법으로 웨인 리쿼만에게 가르침을 잇게 했다. 


**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 실으려고 썼던 글인데 분량 문제로 포함되지 못해서 이렇게 올립니다.


2007년 7월 7일 아침 9시 즈음 로스앤젤레스 외곽 헐모사비치(Hermosa Beach City) 어느 집 앞에 서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집 앞에 우체통이 보인다. 그때 엄청나게 키 큰 한 남자가 맨발로 우체통을 향해 걸어 나와서 우편물을 챙긴다. 인터넷 아드바이타 웹사이트(Advaita.org)에서 본 웨인 리쿼만(Wayne liquorman)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합장을 했다. 웨인은 합장으로 답해주었고 웨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모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 시간에 일찍 왔다. 내가 가진 이 일생일대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의 방해 없이 개인적으로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거절하면 어쩔까 걱정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집에 들어서자 다그치듯 웨인에게 물었다. “저의 구루(영적 스승)가 되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웨인은 “물론, 자네가 원하는 한 스승으로 여기게. 나는 우물이네. 마음껏 원하는 대로 퍼 가게나.”라고 허락하셨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합장하고 자리에 앉아 생에 첫 스승과 함께하는 삿상을 기다렸다.


참으로 기뻤다. 나에게도 드디어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 영적 스승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다른 사람이나 책의 권위를 빌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앎으로 답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부처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오랜 세월 수많은 인연을 쌓아야 하는 일이라고 들어서 난 스승을 만나는 것조차 저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고 나 같이 평범하고 평균에 못 미치는 사람에게는 깨달음을 떠나서 스승을 만나는 것조차 이번 생에는 일어나기 힘든 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드디어 스승의 발아래서 가르침을 접하게 되니 얼마나 기뻤을까?


웨인은 내가 상상하던 영적 스승의 모습과 전혀 맞지 않았다. 영적 스승이라면 뭔가 요가나 명상을 많이 하고 채식을 해서 몸이 마르고 부드러운, 그런 뭔가 수행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키는 거인 같고 배는 불룩 튀어나왔다. 채식은 고사하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 한다. 평정심 있게 길고 차분한 호흡도 아니었다. 부드럽기보다 거칠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의 스승이라는 점에는 한 점 의심도 없었다.


웨인의 이력은 참 독특하다. 책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 (Acceptance of What is)’에 웨인의 지나온 길이 잘 나와 있다. 웨인은 가정이 있었고 무역 관련 비즈니스를 했다. 한국에도 무역 일로 들렀다고 한다. 열심히 사업만 하며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19년 동안 마약에 손을 대었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다. 안 해본 마약 종류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종류의 마약을 해봤다 한다. 그리고 웨인은 세상 모든 일은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며 ‘내가 세상의 중심’이며 ‘내 삶은 내가 통제한다’라고 믿었다. 원하는 것을 못 가지면 내 노력이 부족했기에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살았다. 영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한 번은 며칠을 연달아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며 끝까지 가보는 일이 있었다. 손발은 덜덜 떨렸고 오줌도 질질 쌌다. 그렇게 4일째 되던 날 과도한 마약 사용 끝에 “정말 이러다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토록 오랫동안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됐던 그였는 데 갑자기 술과 마약을 하겠다는 생각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웨인은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술이나 마약을 하지 말게 도와준 것도 아니고 술이나 마약을 안 하겠다고 다짐한 적도 없었다. 반대로 누가 못하게 하면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로 술이나 마약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한 일은 분명 아닌데, 나한테 일어난 일은 맞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자신의 의지로 일어나는 것이며 내 선택의 결과라고, 내가 선택하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영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찾음이 시작됐다. 도대체 우주에 무슨 힘이 있어 내게 이런 짓을 했는지 찾고 싶었다. 그때부터 도덕경, 황벽희운, 장자를 시작으로 영적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별의별 명상을 다 해보고 태극권도 해보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찾아가고 할 수 있는 영적인 것은 다 해본다. 그렇게 그날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중간에 라메쉬와 오른쪽에 라메쉬의 아내, 왼쪽에 웨인이 있다.


찾음이 시작된 지 2년 반이 지나던 어느 날 웨인은 전단지 한 장을 얻는다. 인도에서 누가 와서 할리우드에서 강연하는데 참가비가 1달러밖에 안 된다고 한다. 10달러였으면 안 갔을 텐데 1달러니 뭐 잃을 게 있나 싶어 친구와 길을 나선다. 1987년 9월 16일 그렇게 웨인은 일생의 스승 라메쉬를 만나게 된다. 강연은 참 지루했다. 비 현상 존재(Noumenon), 현상 존재(Phenomenon), 참의식이니, 참의식의 움직임이니,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가 뭐라 했느니, 라마나 마하리쉬가 뭐라고 했느니, 듣도 보도 못한 내용과 전혀 모르는 사람들 말을 해대는 통에 도대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앉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라메쉬의 알지 못하는 뭔가에 끌렸다. 2주 후에 라메쉬의 강연에 다시 참석한다. 이번에는 몇 사람 없었다. 라메쉬가 강연을 시작하자 웨인의 가슴이 열렸다. 영원을 향한 창이 열렸다. 그리고 라메쉬에게 완전히 빠져버린다. 은행장 출신의 늙은 인도 남자, 전혀 예상치 못한 이 노인에게 빠져버린다. 웨인은 정말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한다. 웨인은 손 편지에 사랑의 마음을 담아 라메쉬에게 전달한다. 같이 어울리는 무리 중에 라메쉬와 가까운 사람에게는 질투심까지 났다.


라메쉬가 로스앤젤레스를 떠나던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라메쉬를 배웅하려고 공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라메쉬의 책을 출간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로 옮아간다. 웨인이 이건 사업하자는 말이라며 사업을 하려면 얼마나 다양한 것들이 필요한지 자신의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웨인에게 “출판사 해봤어요?”라고 묻자 대뜸 라메쉬가 “아직은 아니지.”라고 말하면서 어쩔 수 없이 웨인은 라메쉬의 책을 출판하는 아드바이타 출판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웨인과 라메쉬와의 관계가 깊어지는 계기된다.


웨인은 라메쉬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 편집자의 자격으로 라메쉬를 방문한다. 뭄바이의 라메쉬 집에 머물며 라메쉬의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책을 준비한다. 라메쉬가 말하고 웨인은 적고, 그렇게 책을 준비하면서 웨인은 라메쉬의 가르침에 아주 깊숙이 빠져들고 이해는 빠르게 깊어져 갔다.

웨인 리쿼만과 그의 스승 라메쉬 발세카

1989년 4월 어느 날 웨인에게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은 끝이 났다.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슬픔 속에 빠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더 깊고 깊은 슬픔이 계속 밀려왔습니다. 마치 파도가 나를 계속 때리듯이. 그렇게 끔찍한 깊디깊은 어둠의 고통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매 순간 더 어둡고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괴로움이 덮치며 더 깊은 괴로움의 구덩이로 빠져들고 있었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괴로움은 다 겪는 듯했죠. 그러다가 내려놓음이 일어나더군요. 뭔가 소멸되면서 이 괴로움과 합쳐지는 느낌이 났습니다. 그리고 확신이 일어나더군요. 어떤 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는. 왜냐하면, 다칠 수 있는 ‘내’가 없기에. 더는 어떤 분리됨도 없었죠. 말하자면 일어난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 참이해(Understanding)는 늘 여기 있었거든요. 가리고 있던 환상이 떨어져 나갔을 뿐이지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죠. 바뀐 것은 전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늘 있던 그대로 있고 늘 그럴 겁니다. 모두가 다 완벽했어요. 모두, 늘 그렇죠.” 웨인의 책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에서 웨인은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는 경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도에는 영적 스승을 기리는 구루 쁘리니마(Guru Purnima)라는 날이 있다. 1996년 이날 웨인이 뭄바이로 라메쉬를 방문했을 때였다. 삿상이 끝날 즈음 라메쉬가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모두 내일 다시 와야 해요. 내일은 웨인이 묻는 말에 답할 겁니다.” 그렇게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가 라메쉬에게 했듯 라메쉬도 삿상 중에 웨인에게 가르침을 전하라고 권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하게 이끄는 이런 전통이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때부터 라메쉬와 웨인을 거쳐 발라에게까지 이르고 있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와 라메쉬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와 라메쉬

웨인은 처음에는 영적 스승 같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첫 책(No Way: A Guide for the Spiritually Advanced)을 낼 때 세상에 알려지기 싫어 자기 이름을 감추고 람츄(Ram Tzu)라는 필명을 썼다. 그런데 갑자기 하던 일이 없어져 시간이 나던 차에 라메쉬가 가르침을 권하고 여기저기 삿상을 열어 달라며 초청하기 시작해서 아드바이타 가르침을 전하다 보니 어느새 영적 스승이 직업이 됐다.


(** No Way 책은 러시아에서 유명하다 한다. 공산당 시절 영적 문제를 자유롭게 이야기 못할 때는 웨인의 이 책이 러시아 어로 번역돼서 몰래몰래 전해지며 서로 서로 읽었다 한다. 웨인도 나중에 러시아 분이 알려줘서 알았다 한다.) 

뭄바이 라메쉬 집에서 삿상하는 웨인, 뒤로 라메쉬가 앉아 있다. 왼쪽에 웨인의 아내 재키(Jaki)다.

웨인은 집에 있을 때는 자기 집에서 삿상을 여는 데 일주일에 4번씩 연다.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며 채팅방을 열어 놓기에 멀리 있는 사람들도 묻고 답한다. 처음에 나는 웨인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아서 일주일에 3번씩 삿상에 참석했다. 오후 2시에 하는 삿상은 일하느라 못 가고 나머지 3번은 몇 년간 빠짐없이 참석했다. 삿상 참석은 늘 내 일 가운데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 돌아보면, 웨인을 웹사이트에서 한번 보고 만나자마자 어떻게 그렇게 스승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난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가 누군지 라메쉬 발세카가 누군지도 몰랐다. 아드바이타가 뭔지도 몰랐다. 오직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웨인의 소개만 보고 웨인을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 스승으로 그냥 받아들였고 여기에 어떠한 의심도 들지 않았다. 웨인이 라메쉬에게 빠진 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웨인을 마음 깊이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웨인이 라메쉬와 가까워졌던 것처럼 나도 웨인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웨인은 라메쉬를 영적 아버지처럼 따랐고 라메쉬는 웨인을 영적 아들이라고 불렀다. 물론 나의 열정은 웨인의 라메쉬를 향한 열정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웨인은 말 그대로 라메쉬와 사랑에 빠진 수준이었다고 한다. 마치 이성에게 사랑에 빠지듯이. 그래서 부러웠다. 스승에 대한 신뢰만큼 이해도 빠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승에 대한 신뢰는 제자의 가슴을 열고 온전하게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된다.


찾음에서 스승이 중요한 것은 
스승 때문이 아니라 
스승을 향한 제자의 열린 마음 때문이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영적 가르침은 오래 묶은 편견을 벗겨내고 세상 보는 눈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냥 머리로 배우는 일이 아니다. 스승은 ‘당신’을 소멸시키려 하는 사람이다. 영적 스승의 가르침만큼 혁명적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가르침은 없다. 그러기에 스승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고는 어떠한 형태로든 스승을 밀어내려 한다. 에고에게 스승은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고 전적으로 내맡길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축복이다. 웨인은 내 찾음의 길에 진정한 축복이었다. 웨인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승의 말이 이해가 안 되거나 모순이 있으면 내가 뭘 이해 못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계속 살펴봤다. 스승이 뭘 가리키려 하는지 보려고 애썼다. 스승에 대한 의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웨인은 그리 친절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핵심 주제 이외에 개인적 문제에 관해 말하면 오랫동안 끌고 가지 않는다. 늘 다시 핵심으로 돌아오고 질문하는 이가 직접 살펴보도록 질문을 되돌려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며 뭔가 할 거리를 원하는 찾는 이에게 어떠한 수행 거리도 주지 않는다.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답을 원하는 데 어떠한 답도 주지 않는다. 좀 부드럽게 인생 상담도 하면서 할 거리도 주고 살살 달래며 희망을 심어줘도 될 것 같은데 별로 이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웨인의 가르침은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삿상에 처음 왔다가 다시 오는 이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왔다가 다시 오지 않는다. 뭔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냥 가는 것 같다. 웨인은 뭔가를 주지 않는다. 주기는커녕 뭔가 내려놓고 가도록 한다. 답을 얻기는커녕 의문을 더 안고 간다. 갈증이 풀리기는커녕 더 갈증 나게 한다. 집에서 하는 웨인의 삿상에는 사람들이 몇 안 된다. 내게는 참 좋았다. 언제든지 스승의 바로 앞에 앉아 질문할 기회가 늘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중적이고 유명한 스승들에게 몰린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뭔가 더 훌륭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승은 각자 개성의 차이만 있을 뿐 더 낫고 말고도 없다. 더 깊은 이해 따위는 없다. 부처와 예수부터 라마나 마하리쉬나 웨인이나 로버트나 리사나 나탈리나 그 누구든, 찾음이 끝나며 일어나는 앎은 똑같다. 어떻게 다를 수가 없겠는가? 하지만 말을 더 잘하고 더 호감 있고 따뜻하게 비치는 스승은 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 다르듯 스승도 마찬가지다. 대중에게 친숙한 스승들이 있다. 특정 스승들의 책이 많이 번역되고 특정 스승들의 명상 캠프에 사람이 많이 몰린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많이 팔리는 책은 대중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 말은 많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많은 대중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가르침의 깊이가 깊지 않다. 스승에게 깊은 이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대중에게 편한 가르침만 퍼져 나간다는 말이다. 그래야 출판사는 책을 팔 수 있다. 번역되는 많은 영적 서적들이 그렇다. 깊은 가르침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이 대중이 바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편견을 깨야 하는 찾음에서 대중의 마음에 드는 책은 에고가 원하는 답들로 채워진 경우가 많아서 실제로 찾음을 끝내는 데는 크게 도움 되기 힘들다. 입문서만 가득하고 깊이 파고드는 전공 서적은 잘 없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스타 스승들이 여는 명상 캠프에 가면 질문할 기회를 잡기도 힘들고 여러 날을 걸쳐 깊이 질문을 이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람이 너무 많다. 돈도 많이 든다. 또 스승과 같이하는 시간도 많지 않다. 대다수 질문은 인생 상담이 대부분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질문과 그에 대한 스승의 답을 듣고 있으면 많이 와닿을 때도 많고 많은 의문이 해소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승과 일대일로 나 자신의 질문을 하고 스승의 답을 듣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내가 앉은 위치에 따라 달을 가리키는 스승의 가리킴을 직접 듣는 것이 나는 더 좋았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난 이렇게 직접 가리키는 살아 있는 가리킴이 더 좋았고 이런 기회가 많았다.


웨인의 거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누구나 늘 질문할 기회가 있었다. 또 며칠 와서 질문하다 보면 딱히 할 질문도 없다. 웨인은 계속 스스로 살펴보게 밖으로 향하는 의문을 묻는 이의 내면으로 되돌려준다. 웨인은 인생 상담에는 관심 없다. 그런 문제를 물어보면 상담사를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몇 마디 없이 늘 스승과 눈을 마주치며 침묵 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웨인은 늘 라메쉬의 사진을 옆에 두고 삿상을 한다.

한 번은 불교 신자인 할머니께 부처님 만나서 가르침을 듣는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부처님한테 가거든 내 언제 죽을 건지 좀 물어봐라.”라고 하셨다. 두 눈이 안 보이시는 할머니는 참 힘들고 따분한 삶을 사셨다. 늘 내일 죽어야지 하시며 30년 이상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웨인에게 가서 삿상 중에 할머니의 질문을 대신 물었다. 웨인은 “자네 할머니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할머니가 별로 좋아할 대답은 아니네요.”라고 답했고 웨인은 “그렇지.”하면서 껄껄 웃으셨다. 처음 웨인을 찾았을 때 참 다양한 질문을 많이도 했었다. 오랫동안 내 나름대로 찾아오면서 쌓아온 잡동사니가 많았다. 도인들, 귀신들 이야기, 전생과 미래의 이야기, 온갖 불교 믿음들, 온갖 기독교 믿음들, 온갖 뉴에이지 영향을 받은 믿음들, 온갖 이전 스승들의 말씀을 읽으며 내 나름대로 쌓아온 해석과 믿음들, 오랜 세월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쌓아온 수많은 가치와 믿음들, 사회에서 세뇌해온 온갖 확신과 믿음들, 그리고 살아오면서 내가 쌓아온 삶에 대한 편견과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 등등 참 많았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많은 믿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지 몰랐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믿음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에게 지워진 짐의 무게를 늘 체험하며 살아간다. 늘 힘들다고 말하지만 내려놓지 못한다. 아무리 쓸데없는 짐이니 내려놓으라고 말해줘도 내려놓을 수 없다.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자기 생각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좌절도 겪어야 한다. 세상이 마음대로 안 되고 마음의 병이 생기고 병은 몸으로 옮겨간다. 늘 불안에 시달리고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한다. 늘 혹시 이러면, 혹시 저러면 하고 실체도 없는 수많은 근심 걱정을 만들어내며 그 생각들이 진짜라고 믿고 엄청난 괴로움 속에 살아간다. 고통 속에서도 이 많은 믿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내려놓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내려놓을 수가 없으면 괴로움 속에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닌가?

한때 나의 모습이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닌가?

웨인이 즐겨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이 절벽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다. 도와 달라고 소리친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제발 신이시여!”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신이다.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신의 응답을 받아 너무나 기뻐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소리치고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하늘에서 응답한다. “줄을 놓아라. 그러면 괜찮을 것이다.” 응답받은 사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절벽 위를 향해 소리친다. “거기 다른 사람 없소? 도와주시오!” 우스갯소리 같지만, 정확히 예전 나의 모습이었다. 많은 이가 짊어진 짐에 눌려 힘겨워하면서 도와 달라 애원하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면 짊을 내려놓지 않고 차라리 짊어지고 간다. 내려놓기란 참 쉽지 않다. 나는 짊어진 짐들을 웨인 앞에 하나씩 풀어 놓았다. 참, 많이도 쌓여있었나 보다. 내려놓는 데 한참이 걸렸다. 다 내려놓기까지 꼬박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얼마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지나온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짊어진 짐이 많아서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이보다 훨씬 빠를 수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진리가 눈앞에 있다. 지금 당장 눈을 뜨려고 하라. 깨달음을 지금 당장이 아니라 미래의 것으로 만드는 어떠한 속삭임에도 속지 마라. 무엇이 필요하다, 무엇을 해야 한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다는 것은 바로 앞에 놓인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기 싫은 에고의 속삭임일 뿐이다.


모든 믿음을 내려놓으라. 있는 그대로에 항복하라. 바로 지금!


스승을 만나기 전까지 진리는 저 머나먼 무언가였다. 다른 사람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 말하며,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면서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더는 깨달음은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살아 있는 가능성이었다. 웨인은 늘 자신의 가르침을 살아 있는 가르침이라 일컫는다. 살아 있는 가르침이기에 활활 타오르는 스승의 불꽃에 짊어졌던 짐들을 하나씩 태워버릴 수 있었다. 웨인의 직선적이고 무자비한 가리킴 덕에 쓸데없이 또 다른 믿음의 짐을 더 보태지 않을 수 있었다. 제자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해주면 당장 기분은 좋겠지만 찾음에 도움이 안 된다. 듣고 싶은 답은 에고가 원하는 답이다. 거짓 믿음을 강화하는 답이다. 듣고 싶은 답을 해주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지갑을 기꺼이 연다. 하지만 웨인은 그러지 않는다. 에고가 원하는 답은 철저히 피하고 에고가 소멸하는 길을 가리킨다.

2017년 10월 21일 웨인과 함께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삿상 중에 늘 앉아서 보던 스승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늘 보던 스승의 모습을 담았다.


웨인의 집 삿상에서

웨인은 나의 공식 스승이다. 난 웨인을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한다. 나의 첫 구루였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2018년 12월 찾음이 끝나고 참석한 삿상에서 웨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했다. 웨인에게 허락을 받고 불교식으로 삼배의 절을 올렸다. 그렇게 나의 스승에게 찾음의 끝을 알리고 찾음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절하고 나니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한 움큼 고였다.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은 늘 그렇다. 예전에 라메쉬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다. 삿상을 마치고 인사할 때 웨인께 위로의 말을 건넸다. 웨인이 라메쉬를 영적 아버지로 모시면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기에 아버지를 잃는 슬픔일 거라며 얼마나 상심이 크시냐고 말했다. 합장하며 인사하는 내게 합장으로 답할 때 눈에 눈물이 그렁하던 웨인의 얼굴에서 스승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웨인은 내게 태산같이 든든한 존재다. 찾음이 끝난 뒤에도 가끔 웨인의 삿상에 가서 앉아 있다. 그러면 집에 온 것처럼 늘 편하다.


웨인은 매년 정기적으로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시며 삿상을 연다. 마하라지와 라메쉬의 사진이 걸려있다.

1월 11일 2020년 새해 처음으로 웨인의 삿상에 참석했다. 삿상이 끝나고 웨인에게 저의 책이 나왔다고 말하며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를 드렸다. 웨인이 라메쉬에게 그러했듯, 나도 웨인에게 책을 드리며 스승의 가르침이 제자를 통해서 퍼져나감을 보고드렸다. 물론 웨인이 한글을 읽을 리 만무하지만, 스승에게 이렇게 보고하는 일은 의미가 깊다. 웨인이 책 제목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셨다. "Truth IS right here, right now."라고 답해드렸다. 웨인이 "I'm so happy with it"라며, 참으로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시며 기뻐하셨다. 늘 그렇듯, 나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스승의 눈을 보고 "Thank you."하고 답했다. 가슴에 울리는 감동이 크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910119

웨인이 ‘주유소에서 만난 부처 (Buddha at the Gas Pump, 79회 인터뷰)‘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 가르침의 가장 기본적인 가리킴은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나이가 2살 반 즈음 되면 자신이 분리되어 있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개체라는 의식이 생겨나는데, 여기서 주체라는 말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최종적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의식입니다.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만든 것이고 자신이 그 행동의 근원이라는 의식이죠. 거의 모든 인간이 이런 의식을 공유합니다. 이 의식은 우리 사회의 문화와 종교의 일부이고 교육도 마찬가지죠. 부모들도 자식에게 이 의식을 강화시키죠. 거의 모든 인간이 이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내가 살아 있는 가르침이라고 일컫는 이 가르침에서 묻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사실인가?’입니다. 정말 그런가? 우리가 정말 분리되어 있고 독립적이며 뭐든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사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죠.”

웨인 리쿼만, 나의 영원한 스승에게 깊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삼배 올립니다.

웨인의 웹사이트:

https://www.advaita.org/

작가의 이전글 도덕경과 노자 가르침의 핵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