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이 멀어있다.
3살이 되기 전 눈이 멀어 빛을 기억하지 못한다.
눈 뜬 이가 다가와
꽃이 핀 봄의 들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한다.
해가 지는 노을의 하늘이 어떻게 변하며 감동을 주는지 노래한다.
사랑하는 이의 눈을 바라보는 기쁨을 노래한다.
꽃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노을을 바라보는 그분의 감동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이를 보는 기쁨을 알 것만 같다.
노래를 들려주는 그이에게 너무나 감사해 눈물이 흐른다.
기쁨과 감동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눈먼 친구들에게
꽃이 핀 봄 들녘의 아름다움을
노을의 감동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기쁨을 전해준다.
어떤 이는 같이 기뻐하고
어떤 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꺄우뚱하고
어떤 이는 화를 내고
대부분은 관심 없이 돌아선다.
기쁨과 감동은 절망으로 바뀌고
또 언젠가 눈 뜰 날이 오리라 희망으로 가득 차기도 한다
눈 뜬 이가 격려하고 위로한다.
눈 뜬 이가 노래할수록
눈이 멀어 있다는 사실이 더 선명해진다.
어떤 순간에도 난,
눈이 멀어 있음을 잊어본 적이 없다.
찾음이 치열하던 어느 날
2018년 3월 18일
찾음이 치열하던 어느 날 위의 글을 적었다.
찾음이 끝나고 쓴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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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열린 이후로 5년의 세월이 더 지나갔다. 하지만 깨달음은 아직 저 멀리 있었다. 언제 찾음이 끝날 수 있을는지, 제발 죽기 직전이라도 진리를 한 번은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찾음을 이어나가던 어느 날이었. 2017년 11월 말의 어느 날,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른 여러 생각과 다르게 마치 선언하듯 말한다. ‘이제 눈을 뜰 때다(It’s time to SEE).’
이제 눈을 뜰 때다.
이런 내면의 소리는 생전 처음이었다. 이 말은 받아들이고 말고 할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 명확한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집중적인 찾음이 시작됐다.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선언과 동시에 머릿속 중앙에서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영적 문제를 생각하거나 살펴볼때면 늘 느껴졌다. 일하거나 TV를 보거나 할 때는 느껴지지 않다가, 영적 문제에 집중할 때면 마치 찾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듯한 표시등 처럼 어김없이 생겼다 사라지곤 했다.
이 선언으로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궁극적 깨달음이 미래의 언젠가 일어날 일이거나 다른 대단한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믿음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일로 받아들이게 됐다. 엄청난 생각의 전환이었다. 이제 궁극적 깨달음은 더는 미래의 언젠가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이 뭐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지금 당장 눈을 떠야 했다. 이제 눈을 뜰 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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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메쉬의 비유처럼 진리를 가리키는 일은 마치 눈먼 사람에게 색깔을 알려주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색깔을 잘 설명하고 그 아름다움을 말해도 눈먼 이가 이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눈먼 이가 색깔에 관해 수많은 지식을 쌓고 박사학위를 받아도 색깔을 아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색깔에 관한 정보를 아는 것일 뿐. 그래서 눈먼 이는 눈을 떠야만 한다. 오직 눈먼 이가 눈을 뜨고 직접 봐야 색깔을 안다. 눈 뜨기 직전까지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눈을 뜨고 직접 색깔을 보면 자신의 관념이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직접 보고 아는 것은 관념과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눈을 뜨고 나면 어떤 관념도 필요 없다. 그리고 아직 눈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색깔을 설명할 수 있다. 이때는 색깔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든 틀리지 않는다.
실제 찾음은 이 비유와 조금 다르다. 사실, 어이없게도 눈먼 이의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단지 자기가 눈을 못 뜬다고 잘못 믿었을 뿐이다. 그냥 눈만 뜨면 색깔을 볼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자기는 눈을 못 뜬다고 믿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사실은 이보다 더 충격적이다. 알고 보니 눈먼 이는 늘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어떤 까닭인지 자기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믿고 자기의 눈이 멀었다고 믿는 이상한 최면에 걸렸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게 말이 되느냐?”라며, “너무 심한 비유가 아니냐?”라고 물을 수 있는데, 당신이 눈을 뜨고 보면 이것이 전혀 심한 비유가 아니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눈을 가리는 것은 오직 거짓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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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현실은 꿈과 같아서 어느 것 하나, 둘로 나눌 수가 없다. 엄청나게 많고 놀랍도록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 세상의 본질은 하나의 거대한 꿈으로 실재한다.
거대한 꿈 그 자체다. 그런데 거대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크고 작음은 꿈 안에서 일어나기에 꿈 자체에는 어떤 상대적 개념도 없어 거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꿈꾸는 의식만 존재하기에 크고 작음이 없다. 또한, 안과 밖의 개념도 없기에 ‘꿈 안’이라는 말도 맞지 않다. 의식 속에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에 의식에는 안과 밖이 없다. 꿈이라는 형태로 비유되는 의식만 존재한다. 꿈을 꾸는 ‘신’과 같은 존재도 꿈 안에서 일어난다. 꿈 밖에 꿈꾸는 자 같은 것은 없다. 다 꿈속의 내용이다. 꿈이 곧 의식이다. 꿈으로 비유되는 의식이다. 참의식이다. 오직 참의식만 존재한다. 참의식만 존재다. 참의식이 실재다. 참의식만 있으므로 존재라는 말도, 실재라는 말도 의미가 없다. 어떤 개념도 참의식 안에서 일어나기에 참의식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떤 개념도 없다. 당신에게 말하는 ‘참의식’이라는 이름은 그저 ‘지금 여기 있음’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도(道)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기에 찾음이 끝나면서 직관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직관으로 알뿐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오직 말로써 가리킬 수만 있다. 가리킴을 들은 찾는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의 관념으로 자기만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 어쩔 수없는 의사소통의 한계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가리킴을 따라 살펴보다가 마침내 눈먼 이가 눈을 뜨면서 세상의 색깔을 직접 보고 “아하!” 하며 미리 눈뜬 이들이 왜 그렇게들 가리켰는지 비로소 안다. 그렇게 알면 그뿐이다. 할 말이 따로 없다.
눈을 뜨면 그냥 안다.
눈이 멀었다고 믿는 그대에게 이 글이 때로는 위로가 때로는 지팡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