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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Jun 06. 2019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 끝의 시작 3편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이 끝나다.

여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몬트레이에 위치한 아실로마(Asilomar) 콘퍼런스 센터다. 12월 4일 화요일, 아디야샨티의 명상캠프에 참석한 지 3일째 되는 날이다.


끝의 시작 1 편

끝의 시작 2 편

아드바이타 카페


이틀전 캠프 첫날에 관리자가, 내일부터 아침 명상 뒤에 아지(아디야샨티를 ‘아지’라고들 부른다)의 아내 묵티(Mukti)가 매일 만트라를 같이 한다고 알려줬다. 그 말을 듣고 “오, 난 만트라를 전혀 한 적이 없는데, 새로운 것을 배우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만트라는 티베트 불교의 비밀스러운 어떤 수행방법 정도로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묵티와 함께 사람들이 다 같이 만트라를 외우는데 깜짝 놀랐다. “가테 가테 파라가타 팔삼가테 보디사하”, 약간 다른 음률이지만 이것을 모를 리 있을까? 바로 반야심경 마지막에 나오는 진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가 아닌가! 이게 만트라라면 나도 수없이 되뇌던 만트라다. 예전에 반야심경을 좋아해서 자주 듣고 낭독하곤 했다. 내게 한글로 익숙한 이 만트라를 영어 발음으로 처음 들으니 어색했다. 그래서 어제는 혼자 조용히 한국말로 따라 했다. 오늘 아침에 다시 만트라를 되뇔 때는 어색함이 적어서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 자꾸 따라 하다 보니 마음에 들었고 왠지 중독성이 있었다. 계속 머릿속에 맴돌며 따라 하게 됐다.



명상 시간 뒤, 쉬는 시간에 산책하고 있었다. 아침에 따라 한 만트라가 계속 머리에 맴도는 가운데 문득 내 찾음의 시작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찾음의 길로 들어선 걸까?” 가끔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종종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어떤 영적 경험을 하고 그 황홀한 경험을 다시 찾고 싶어 영적 찾음의 길로 들어섰다고들 말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딱히 영적 경험 한 번 못 해본 나로서는 내심 부러웠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문득 11살 즈음의 내 어린 시절과 마주친다.


할머니를 따라 간 절에 사람들이 관세음보살 보름 정진 중이다. 수백 명의 군중이 절 안에 앉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크게 되뇌고 있다. 아이는 눈을 감고 앉아 열심히 반복해서 ‘관세음보살’을 따라 한다. 관세음보살이 뭔지도 모른다. 그냥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 중에 한 분인 것만 알 뿐이다. 왜 그렇게 똑같은 말을 되뇌는지도 모른다. 다들 하니까 뭔가 좋은가 보다 하고 따라 한다. 관세음보살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불러대는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참으로 열심히 진실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쉴 새 없이 외쳐댄다. 


불현듯 이런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아이가 눈을 감고 바라보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그 집중의 이미지. 그리고 이것이 내 찾음의 시작이었음을 직감했다. 아, 이렇게 찾음이 시작되었구나. 마침내 찾음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게 되자 그때 아이의 진실한 마음이 가슴으로 강하게 느껴지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상하게 아이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계속 눈물이 났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되뇌던 관세음보살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연해졌다. “아하! 관세음보살은 바로 참인식(Awareness)이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인식이다. 관세음보살은 참인식, 참의식(Consciousness)이라고도 불리고, 절대(Absolute), 그것(That), 니르바나(Nirvana), 신(God), 하나님, 성령(Holy Spirit), 참주체(Self), 참나, 진아, 도(道)라고도 불린다. 종교와 문화, 그리고 스승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다르지 않다. 어떻게 다를 수가 있겠는가? 있는 모두가 그것인데. 불교에서는 부처의 깨달음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해서 관세음보살을 만들었다. 아! 참으로 감탄스럽다. 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인지. 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인지 너무나 명백해졌다. 왜 만트라로 관세음보살을 그렇게 외치게 했는지 옛 스승들의 지혜가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천수천안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진정 모든 부처가 깨달은 진리 그 자체다. 바로 이 세상 그 자체인 참인식이다.



그날 저녁 아디야샨티와의 대담 시간에 오늘 찾은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같이 나누고 또 지금까지 내게 일어난 깨우침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선명해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깨우침의 혼란을 뚫고 궁극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지 이 스승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명상캠프 동안 침묵을 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강당에 모인 350명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루에 3~4명만 질문할 수 있어서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침묵 속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게 대담 시간이 아쉬움 속에 끝나고 휴식 시간과 그날의 마지막 명상 시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휴식 시간 중에 갑자기 “이제 찾음을 끝낼 때다. (It’s time to end seeking)”라는 강한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놀랐다. “이제 눈을 뜰 때다. (It’s time to SEE)”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은 뒤, 딱 1년 만에 다시 들리는 내면의 소리였다. 내면의 소리는 늘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선언이다. 그렇게 찾음이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이렇게 갑자기?”라는 생각과 함께 걱정이 들었다. “끝내고는 싶지만 찾음이 끝난 뒤에 약간의 의문이라도 남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곧바로 “작은 의문이라도 남으면 절대 찾음을 끝내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일어나면서 “그래 끝내자.”라며 바로 받아들여졌다. 어떻게 이 기나긴 여정이 끝날지, 아니면 정말 끝나기나 할지 궁금했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또 다른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깨달음을 내려놓아라. (Let Enlightenment go)” 세 번째 들리는 내면의 소리며 10여 분 만에 다시 들리는 내면의 소리였다. 궁극적 깨달음에 대한 모든 기대나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해방된 자유의 안내자 빌이 명상캠프에 참석하기 전 마지막까지 내가 어떤 특별한 깨달음의 경험을 기대하는 것 같다면서 기대를 내려놓고 ‘거짓 나’에 대한 믿음에 집중하라고 여러 번 권했던 사실이 생각났다.


저녁 9시가 되자 휴식 시간이 끝나고 그날의 마지막 명상 시간이 시작됐다. 아디야샨티가 들어와 앉고 나는 강당에 모인 350여 명의 사람들 사이에 앉아 눈을 감는다. 명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명상이 시작된다. 마음속으로 “깨달음을 내려놓자, 깨달음을 내려놓자” 계속 되뇐다. 아침에 들었던 만트라가 머릿속에 마치 배경음악처럼 맴돌더니 잠시 뒤에 ‘관세음보살’을 되뇌는 11살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끊임없이 만트라를 되뇐다. 만트라를 되뇌는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머릿속을 지배한다. 아이는 절에 모인 수백 신도들의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소리에 질세라 참으로 열심히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되뇐다. 아이의 마음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아이가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눈을 감고 마주하던 그것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강하게 일어나는 깨우침, 그 아이가 눈을 감고 보던 그것이 지금 내가 눈을 감고 마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그 순간 내면에서 강하게 선언한다.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나는 참인식이다. 

나는 참인식 그 자체다. 

이것이 궁극적 깨달음이다.

이것으로 찾음은 끝났다.”


(“I’m 관세음보살. 

I am Bodhisattva. I am Awareness. I am Awareness itself. 

This is Enlightenment. This is End of Seeking.”)


2018년 12월 4일 화요일 저녁 9시 15분경이다. 이렇게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의 여정은 끝이 났다.


아이가 그렇게 외치던 ‘관세음보살’이 바로 나의 진정한 이름이었다. 나의 참모습이었다. 진정한 참나의 정체를 찾았다. 이 세상을 비추는, 이 세상 그 자체인 참인식! 참의식, 참인식, 신, 진아, 관세음보살, 여호와, 하나님, 성령, 절대,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존재하는 것은 이뿐이다. 어떻게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나는 참인식이다. 나는 성령이다. 이 모두가 같은 말이다. 이 말을 니사르가다타는 “나는 그것이다. (I’m THAT)”라고 했고, 예수는 “나와 하나님은 둘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라메쉬 발세카는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다.”라고 말하고 성경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라고 한다.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고 처음과 마지막에 존재하는 모든 것인데 어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영혼’ 따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했을 때 다른 사람들 말고 자신만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한 게 아니다. 예수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주위 사람들 모두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버지와 하나라는 말이다. “세상에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도 다른 말이 아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세상 모두는 성령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부처가 되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부처다. 불교 스승이 “모든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할 때, 이때의 마음이 참인식, 참의식이다.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다.”와 같은 말이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달을 가리키든지 일단 달을 보면, 다양한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곳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연히 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이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성령이며 부처이며 참의식이며 관세음보살이다. 그래서 모두가 절대 평등하다. 높다, 낮다, 귀하다, 천하다 같은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결코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존재보다 우월할 수 없다. 세상 누구도 다르지 않다.


이것은 다른 거룩한 책이나 누군가의 권위를 빌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일상의 아주 평범한 사실처럼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이다. 한 치의 의심도 없다. 궁극적 깨달음은 어떤 특별하고 환상적인 영적 경험도 아니다. 당연한 일상의 말처럼 간단하고 명료했다. 이것이 석가모니, 나사렛 예수, 노자, 장자, 라마나 마하리쉬,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라메쉬 발세카, 웨인 리쿼만, 로버트 울프, 아디야샨티, 그리고 그 어떤 깨달은 스승이 되었건, 그들에게 일어난 깨달음과 지금 여기 일어난 깨달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결코, 다를 수가 없다. 어떻게 다른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관세음보살’을 반복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나가지 않고 맴돌면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이 그치지를 않는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만트라를 무슨 뜻인지 왜 하는지도 모른 채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성심껏 되뇌는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울리고 눈물은 그치지 못한다. 이 아이의 ‘관세음보살’이 바로 지금까지 오게 한 찾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찾음은 33년의 세월을 지나 그 시작으로 돌아와 끝을 맺었다. 완전한 원을 완성하며 찾음은 끝났다.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웃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아이는 자기 이름을 그렇게 반복해서 외쳐대었다. 그 아이와 함께 절에 모여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외쳐대는 수백 명의 신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자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서 찾고 싶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수없이 외쳐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관세음보살 그 자체인데 자기 이름인지 모르면서 그렇게 외쳐대는 장면에 이상하게 계속 웃음이 났다. 주룩주룩 눈물 흘리면서 웃어대는 모습이 마치 실성한 사람 같다. 조용한 명상 시간에 사람들 가운에 앉아 눈물 흘리면서 참을 수 없이 터지는 웃음을 소리 죽여 웃어대는 일은 쉽지 않았다.


40분간의 명상이 끝나고 사람들이 일어나 자리를 뜨는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메릴 홀(Merrill Hall)의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까지 꼼짝없이 그러고 있었다.




명상캠프가 끝날 때까지 이틀 반이 더 남았다. 찾음은 끝났지만, 끝까지 일정에 맞춰 명상캠프에 남아 있었다. 나머지 시간 동안은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3살 때 해인사에서 만난 노도정 스님과 나를 향한 그분의 오랜 기도, 나를 이끌고 절에 가신 할머니, 왠지 모르게 찾아오던 침묵의 시간들, 수많은 참선의 시간, 불교 학생회 때 선배의 반강요에 참석한 정토 깨달음의 장과 안내자 승혜 스님, 라마나 마하리쉬와 오쇼 라즈니쉬, 단전과 기공, 태극권, 그리고 바라보는 기공 명상, 찾는 것이 무언지도 모른 채 큰 물음표 하나 짊어지고 안개 속을 걸어가던 기나긴 시간들. 그러다 드디어 찾게 된 아드바이타 가르침과 여러 스승. 참으로 많은 분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어떻게 이 고마움을 다 갚을까?


그 고마움을 이 책에 꾹꾹 눌러 담아 당신에게 전한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모든 거짓 믿음들을 내려놓고 찾음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란다. 


부디 찾아지기를.


찾는 이가 찾아진다.
그래서 찾는 이도 없고 찾는 대상도 없고 찾음도 없다.



** 책은 출판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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