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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Jun 12. 2024

어느 날 저녁

퇴근 직후 얼른 차에 시동을 걸고 이미 주차장이 돼버린 도로를 느릿느릿 빠져나온다. 우리 집은 내 일터에서 30분쯤 떨어져 있다. 정체되는 구간을 벗어나 20분쯤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한적한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출발 소식을 알린다.


“마트 들러서 상추 좀 사 와.”


쌈채소를 사 오라는 걸 보니 밥상에 고기가 있는 모양이다.


마트에 도착해 채소 코너로 곧장 향한다. 적상추도 있고, 청상추도 있고, 깻잎도 있다. 깻잎 사 오라는 말은 없었으니 상추 두 가지 중에서 고민한다. 두 종류를 섞어야 할지, 한 종류만 사면 될지 잠시 머뭇거린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둘 다 맛이 비슷했던 것 같아 청상추만 한 움큼 집어 담고는 가격 택을 붙인다.


계산대로 향하는데 수박이 먹음직하게 놓여 있다. 수박은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과일이다. 수박을 유심히 살핀다. 배꼽 쪽 줄기가 말라비틀어진 것이나 모양이 예쁘지 않은 것만 대강 추려내 보니 말끔한 수박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얼른 안아서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끈 필요하냐고 묻기에 괜찮다며, 들고 가겠노라 하고 한 손엔 수박 안고, 한 손엔 투명 비닐에 담긴 청상추 한 봉지를 들고 마트를 나선다.


나를 기다리면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가 수박을 보면 참 기뻐할 것 같아서 내 마음도 괜히 들뜬다. 마트에서 집까지는 차로 5분 거리, 날듯 달려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박을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한다.


“우와 수박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된장찌개를 끓이던 아내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고단했던 하루도 스르륵 녹아내리는 순간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저녁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일진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음은 어떠할 것이며 그가 나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는 사실은 또 어떠한가. 거기에 나 또한 그를 기쁘게 해 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참 아름다운 행복이다.


말 그대로 차려진 밥상을 맛있게 나눠 먹는다. 저녁 메뉴는 삼겹구이와 된장찌개다. 후추가 뿌려진 삼겹살 맛이 입맛을 돋운다. 청상추도 물로 씻어 샐러드로 먹는다. 칼칼한 찌개 국물도 멋지다. 부쩍 배가 나와 저녁을 좀 줄여야지 하면서도 늘 집에 와 식탁에 앉으면 결심은 다시 ‘내일부터’가 된다.


식사를 마무리하고, 사온 수박을 몇 조각 잘라먹는다. 수박 배꼽 줄기가 통통하니 신선해 보이더니 달고 시원하다. 남은 수박을 전부 잘라먹기 좋게 통에 담아 두고, 수박 껍질과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한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선다.


다음 코스는 동네 한 바퀴. 30분 정도 돌담을 따라 마을을 걷는다. 단지 내 주차장 어딘가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나선다. 습기 한가득 머금은 마을길을 따라 내려간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고, 멀리서 개들이 짖는 소리도 들린다. 이따금 길고양이들이 후다닥 달려가는 장면도 목격하고, 소리 없이 제자리에 피어있는 백합과 수국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아내는 함께 산책을 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지만 내게도 아내와 함께 마을을 걷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길을 지나는데 최근에 새로 생긴 과속 방지턱 위에 뭔가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달팽이다. 달팽이가 폭 2미터 남짓 되는 좁은 길을 건너고 있다. 어두운 아스팔트 위였으면 못 보고 지나쳤을 텐데, 형광색으로 칠해놓은 과속방지턱이라 눈에 잘 들어온다.


“길 건너는 거 도와줄까?”


아내는 배가 불러서 몸을 숙일 수가 없다. 이 말인 즉 나더러 달팽이를 집어서 반대편 풀 속에 다가 두라는 말이다. 달팽이는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나는 달팽이 집기를 매우 망설인다. 달팽이 집을 잡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묻어 나오고, 더듬이 쪽을 만지니 달팽이 몸이 순간 움츠러든다. 땅바닥에 딱 붙어있어서 세게 잡아당기다간 달팽이가 다칠 것 같아 조심스럽다. 나뭇잎을 가져와 옮겨 보려고도 하고, 나뭇가지로도 슬슬 밀어 봐도 별 도움이 못된다.


“달팽이야 미안해.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힘내렴.”


달팽이는 괜찮을 거라며 걱정하는 아내를 안심시키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달팽이가 못내 궁금해서 다시 달팽이를 보러 간다.


“달팽이가 길을 건넜을까?”

“그 자리에 없었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어떡해, 달팽이가 당신 꿈에 나올 거야.”


다행이다. 달팽이는 열심히 길을 건너고 있다. 일대 모험에 도전하는 달팽이의 건투를 빌며, 달팽이의 안녕을 확인하고는 우리는 발길을 돌린다.


집 가까이 오니 새소리가 가까워진다. 노래하는 새들이 집 주위에 집을 지었나 보다. 주차장에 들어오며 얼마 전 둥지를 만든 제비들을 본다. 이제는 새끼들이 꽤 컸는지 둥지에 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 앉아 있다. 아마 머지않아 제비들은 이곳을 떠날 것 같다.


행복은 바로 여기 있다.


나는 행복하다.


나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어서 행복하다.

아내와 함께 밥상을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하다.

아내를 위해 수박 한 덩이 골라 집으로 향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수박 나눠먹을 아내가 있어서 행복하다.

함께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아내가 있어 행복하다.

길 지나는 달팽이도 눈여겨보는 아내가 있어서 행복하다.

달팽이 구출작전은 실패했지만 한참 달팽이를 쳐다보고 있을 수 있어 행복하다.


가까워지는 새소리 들으며 집으로 향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행복은 저기 멀리 있지 않다.

여기 가까운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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