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는 사람

by 정필

아빠를 기억 속에 불러내어 글을 쓰고 있노라니, 내가 아빠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주 커다란 장독에서 장을 꺼내 담으려고 내려다보고 있는데, 안이 텅 비어있는 걸 계속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애틋한 척은 다 했는데, 실상은 내가 아빠의 인생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고 전부 먼발치서 관찰한 내용이거나 ‘그랬겠거니’ 추측한 내용뿐이다. 뭐든 좋으니 아빠에 관한 모든 것을 천천히 풀어낼 생각이다. 내가 가진 아빠에 대한 기억은 점차 휘발될 테니, 하나라도 더 남아 있을 때 꺼내서 글자로 만들어둘 생각이다.


아빠는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종종 아빠와 함께 일하러 간 엄마를 퇴근시간에 맞춰 마중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20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를 여유롭게 거닐듯 지나쳐 엄마를 만나러 갔던 기억이 난다. 아빠 주변엔 빠른 것, 소위 말해서 시간을 아껴주는 것들이 없었다. 이를테면 자동차라든지, 최신 스마트폰 기기라든지, 컴퓨터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아빠는 먼 거리도 걸어 다녔고, 배차가 긴 버스도 잘만 기다려 타곤 했다. 느릿느릿 지내면서도 한 번도 어딘가에 늦는 걸 본 적은 없다. 시간을 ‘절약’ 해주는 도구와 친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시간을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핸드폰이나 디지털 기기를 잘 다루지 못했다. 대신 종이와 펜을 사용하셨다. 흰색 몸통에 검은색 머리를 가진 모나미 검정 펜과 줄 간격이 10mm 정도 되는 편지지는 아빠가 가장 자주 사용하던 메모지였다. 내용은 부실하지만 글자만큼은 반듯한 아빠의 메모가 눈에 선하다. 버스 정류장에 핸드폰도 쳐다보지 않고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아빠, 그러면서도 엄마가 내려도 별로 반가운 티도 못 내는 아빠였다.


한 때는 아빠가 어리숙해 보이고 좀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이해에 밝지 않고 늘 ‘손해 좀 보면 어떠냐.’ 하는 식도 싫었다. 아빠가 사람 좋은 게 왠지 우리 가족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 같았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였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도 있다. 세상이 다 그렇게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아빠는 천하태평인 것 같아 보여 그게 싫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빠르게 사는 것보다 외려 천천히 걷듯 사는 게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일 수 있겠다 싶다. 나는 늘 아빠가 나에게 더 해줄 수 있는 것만 생각했고, 아빠의 삶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부모를 도구 삼아 더 나은 환경만을 바라는 철부지 자식처럼, 내가 바랬던 건 실은 내가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아빠는 다 같이 달리는 방향을 따라 뛰지는 않았지만, 자기 나름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결론짓는다. 아빠는 행복했을 거다. 어른이 된 자식들에게 계좌이체로 편히 용돈을 건네는 대신 지폐 몇 장을 뽑아 쪽지와 함께 책상에 올려두는 즐거움, 버스 타고 돌아올 아내를 맞으러 나가 버스정류장에 앉아 누리는 기다림, 퇴근길 테이프로 묶인 과자 세 봉을 몇 개 집어 드는 설렘. 아빠의 삶은 잔잔한 즐거움으로 차 있었을 것이다. 아빠의 퇴근 시간 무렵 현관 앞에서 나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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