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과 인생

끄트머리에 서서

증명사진을 찍으며

by 정필

오랜만에 증명사진을 찍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새로 찍고 싶었다. 첫 직장에 입사할 때 사원증에 들어갈 사진을 찍은 게 마지막이었으니 몇 년이나 지난 셈이다. 직장은 이미 그만두었고, 사진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서였을까,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보면 인생의 여러 단계의 끄트머리마다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첫 돌을 맞은 아이일 때, 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할 때마다, 그리고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한 발 내딛을 때 사진을 찍었다. 끝과 시작이 맞닿아 있는 곳, 거기에는 항상 사진이 있었다. 나는 지금 또 새로운 끄트머리에 서 있다.


직장을 걷어차고 호기롭게 떠나왔다. 그동안 묻지 않고 살아왔던 질문들을 꺼내 내게 물었다. 나와 대화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내게 말을 걸고, 내 마음이 대답하는 것을 글로 받아 적었다. 고민은 젊은이의 특징이라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민하는 나는 아직 젊은가 보다.


좋은 삶은 무엇일까. 내가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일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좋은 죽음은 어떤 것일까와 같이 정답 없는 질문을 끌어안고 씨름했다. 어려운 질문이다. 정답도 없으며, 타인의 모범적 풀이도 내게 꼭 맞지 않는다. 그러나 묻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질문을 묻지 않고, 답을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훗날 내게 허락된 시간의 끝에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물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알아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알아내야 한다. 삶의 의미를 묻지 않고 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다시 나를 찾아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죽지 않는 인생은 없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지나가버린 삶을 안타까워하며 의미를 찾아본들 이제는 쓸 수 있는 시간조차 너무 짧다.


보통 남자는 사춘기를 몇 번 겪는다. 가장 흔히 알고 있는 중학교 2학년 시절이 대표적이다. 반항도 하고, 나름 진지한 고민도 좀 하는 시기인 것 같다. 그리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 내내 실컷 놀고 2학년을 맞아서 한번 더 사춘기가 온다. 나의 경우에는 1년 내내 신나게 놀았어도 별 것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고, 대학 공부도 신통치 않아서 그랬던 듯싶다. 그 시기를 지나면 군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졸병 시절에는 사춘기를 겪을 틈이 없다. 시간이 좀 지나고 상병 5호봉쯤 되어 군생활의 끝이 보일 즈음, 한번 더 사춘기를 겪는다. ‘나가면 뭐 하지’, ‘뭐 해 먹고살지’ 이런 고민들이다. 그 이후에는 직장인 3년 차쯤 되지 않을까? 이 일을 평생 해야 하나, 이렇게 살면 좋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중요한 결심이나 인생의 전환점은 모두 저 시기에 일어났다. 여러 번 찾아오는 사춘기는 답이 없는 고민과 씨름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면서 가치관을 정립해 가는 시기이다. 나를 찾아온 질문에 정성스럽게 대답하면서 시간이 지난다. 그 과정에서 물음표를 펴서 느낌표로 만들어 간다. 그러나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나를 찾아온 질문을 홀대하면, 인생은 좀처럼 다음으로 가지 못하고 쳇바퀴를 돌게 되는 것 같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눈을 들고 조금 먼 곳을 봐야 보이는데, 먹고사는 문제라든가 라이프스타일의 문제를 눈 바로 앞에 갖다 대니 봐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아직 답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내가 찾는 답은 객관식 선다형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삶이라는 붓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텅 비어있던 답안지가 조금씩 채워져 가고 있다. 내가 찾아내고 대답한 질문만큼 나는 성장해 갈 것이다. 석 달간 부지런히 사춘기를 겪었다.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직장을 나왔다. 왜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찾기 위해서 모험을 하기로 했다. 다소 무책임하거나 무모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뭔가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내어 놓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는 무엇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다. 세상은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사람에게 보답한다고 한다.


증명사진을 찍고 들여다보면서 지금 나도 끄트머리에 서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끄트머리라는 말속에는 ‘끝’과 ‘시작’ 모두가 들어있다.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내 손으로 끝낸 지난 길을 떠올리며, 새로 접어든 길 위에서 또 한 번 끄트머리의 설렘을 느낀다. 왠지 기분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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