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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Oct 06. 2023

지금 보이는 물건에서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글을 시작하기 어려울 때

글 쓰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머릿속은 깨끗하게 청소한 것처럼 텅 비어서 먼지 한 톨 없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흰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방에 덩그러니 혼자 놓여있는 것이지요. 뭐라고 붙들고 싶은데, 아무것도 잡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흔치는 않지만 종종 있기도 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이와는 반대로 너무 많은 것이 있는 경우입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다니고 있어서, 마치 방 안에 발 디딜 공간 한 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도 무엇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글쓰기가 어렵습니다. 이것도 아니면 직면하기가 두렵거나, 애써 외면하고 싶은 주제만 잔뜩 떠오른다면 용기가 생길 때까지 글을 쓸 수 없기도 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그 문제를 직면하고 나의 언어로 정의한다는 뜻인데, 문제를 회피하면서 직시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글이 안 되는 이유가 어디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거나, 너무 많거나, 꺼내 놓기 부끄럽거나 하는 경우 외에도 수십 수백 가지가 더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이럴 땐 눈에 보이는 것을 아무거나 붙잡고 글을 써 보는 것도 좋습니다.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십시오. 그러고는 그중에 하나를 골라서 ‘그것’에 대해서 아는 것을 모두 쓰는 것입니다. 별로 쓸 것이 없다고 미리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한 번 써보는 겁니다. 글쓰기는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생각만으로 쓸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제 옆엔 손목시계가 놓여 있습니다. 손목에 차고 있던 것을 풀어서 노트북 옆에 두었는데요, 손목에 차고 있으면 노트북에 닿는 부분이 긁혀서 저도 불편하고 노트북에도 흠집이 나서 빼 두었습니다. 시계 화면이 천정을 향한 채로 시계 줄은 가지런히 한쪽 방향으로 포개어져 있습니다. 시계 화면은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면을 들여다보면 요일, 날짜, 시간을 간단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차고 다녔던 시계로도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저는 이 시계를 갖게 된 지 일 년 정도 되었습니다. 가격은 3만 원 남짓입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 외에 알람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오직 시간 확인하는 용도로만 이 시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손목시계에 대해서 쓰고 있으려니, 몇 종류의 시계가 스쳐 지나갑니다. 군에서는 알이 크고 고무 밴드로 되어 있는 전자시계를 사용했고, 제대한 뒤로는 당분간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핸드폰으로 확인하면 되었기 때문이고, 액세서리 용도로 시계가 필요할 일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면세점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제 생에 제일 비싼 시계를 이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L’로 시작하는 시계 브랜드에서 일했는데, 면세점에서 일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브랜드였습니다. 면세점에서 시계를 팔다 보니, 시계에 관심도 좀 생겼고 하나쯤 갖고 싶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수백만 원짜리 시계를 살 엄두를 내지는 못했고, 가끔 손님에게 시계를 팔면서 착용해서 보여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직원 체육대회를 했는데, 경쟁사 및 같은 산업군 회사가 모두 참여하는 대회였어서 꽤 규모가 컸습니다.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저는 비자발적인 열심을 가지고 응원에 매진했습니다. 이 비자발적 응원이 애처로워 보였던 걸까요. 평생 경품 당첨이라곤 돼 본 적이 없는 저인데, 그날은 어쩐지 2등 경품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때 상품이 ’T’ 브랜드의 500달러짜리 시계였습니다. 마침 시계도 하나 갖고 싶었고, 기계식 시계에 대한 로망도 있었던 터라 참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이재훈 시계로 알려져 있더군요. 처음엔 참 부지런히 차고 다녔습니다. 저는 ‘L’ 브랜드에서 일했지만, ’T’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 다니니 손님들이 늘 물어왔습니다. 성가시긴 했지만 적당히 대답해주고 말았습니다. 


거저 얻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가 파는 시계 브랜드가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점차 시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 비싼 것이었으면 좀 더 흥미가 생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비싼 것이래 봐야 물건이 주는 즐거움은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생각보다 짧고요. 기계식 시계는 건전지를 넣지 않는 대신 차고 다니거나 부지런히 돌려줘야 하는데 착용하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방치해 두니 거의 멈춰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디 나가서 으스댈 가격대는 아니었지만, 제게는 어쩐지 500달러짜리 시계도 과하다 싶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팔아버려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계 매장에서 열심히 일한 경험을 살려 그동안 방치된 시계를 부지런히 닦고 조절해서 당근마켓에 올렸습니다. 지금 다시 보니 22만 원에 팔았네요, 정가 대비 1/3 가격에 훌쩍 팔아버린 셈입니다. 물건을 사간 사람은 대학생 내지 고등학생으로 추정되었는데, 아무리 봐도 별로 이 시계가 왜 필요할까 의아해하면서 팔았습니다. 시계를 사 가시는 분은 “거의 새 거네요”를 연발하며 싱글벙글 돈을 건넸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제 인생에서 가장 비싼 500달러짜리 시계는 제 손을 떠났습니다. 왠지 그때 이후로는 시계를 사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적게는 수십만 원, 수백만 원짜리 시계로부터 수천만 원짜리 시계도 많은 시대이지만, 앞으로는 돈을 얼마를 벌든 그런 데다가 쓰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화려하고 명품이 가득한 면세점 직원이었지만, 어쩐지 제게는 그런 명품이라고 불리는 사치품들이 낯설게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건 말고 다른 걸 팔아야 하나 싶어서 말이죠.


그래도 시계가 아예 없으니 늘 핸드폰을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알림 기능도 있는 스마트워치를 살까도 생각했지만 안 그래도 알림을 많이 보내는 핸드폰이 있는데 굳이 스마트워치까지 사서 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정한 것이 지금의 디지털시계, 일명 ‘손석희 시계’입니다. 가격도 부담 없이 적당해서 좋았고, 손석희 아나운서가 착용했다고 하니 왠지 더 깔끔해 보였습니다. 그때는 ‘전여자친구’였던 대학원생, 지금의 아내에게 시계 하나 사달라고 졸라서 받았습니다. 갖고 싶으면 그냥 사면될 텐데, 저는 가만 보니 만년필도 그렇고 아내가 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괜히 의미를 더 부여해 보고자 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 시계와 함께한 지 1년이 좀 더 되었습니다. 사실 위에 언급한 500달러짜리 시계 말고도 몇 개 손목시계가 있어서 종종 옷 모양에 따라 바꿔 끼기도 했으나, 지금은 요 녀석 하나만 남기고 모두 당근마켓을 통해 팔아버렸습니다. 지금은 어딜 가든 이 시계와 함께 다닙니다. 자판을 두드릴 때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 외에는 전혀 흠잡을 곳이 없는 녀석입니다. 어딜 가나 함께 하기 때문에 애정이 생겼고, 아내가 사 주었기 때문에 더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지금보다 더 어려웠고, 어렸던 시절에 가지게 된 것이라 더 애틋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화려한 시계들, 몸에 두르고 사는 사치품들 뒤로하고 살겠다는 제 나름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으로 한 사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손에 중형 세단 차 가격의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딱 그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시계를 액세서리로 여기고 비즈니스 매너로 여기는 사람이 제 글을 보면 “네가 뭘 몰라서 그런다.”, “남자에겐 시계가 필요하다.”라고 하겠지만 아마 제게는 앞으로도 영영 필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비싼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 제게는 수치로 여겨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반신반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아는 걸 다 써봐야 몇 줄이나 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만큼 썼는데도 아직도 한참은 더 쓸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역시 글은 써야 쓰는 것인가 봅니다. 머리에 한 줄, 눈에 보이는 찰나의 순간이 어쩌면 수십 수백 페이지의 글을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물에서 시작헀지만 그 이후에는 그와 얽힌 저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글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꺼내어 놓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시작하기 어렵다면, 어디에서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하나, 물건에서 시작하는 글쓰기를 한 번 해보았습니다. 소재야 아무렴 어떻습니까. 자신을 더 깊이 알 수 있다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고 들을 수 있다면 되는 게 아닐까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방에 계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손에 핸드폰을 들고 계시거나, 모니터 너머로 글을 보고 계실 테니 핸드폰이나 컴퓨터는 곁에 있을 것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사방이 흰 벽으로 된 곳에 있다 하더라도 머릿속에는 어떤 물건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무엇이 떠올랐든, 아마 처음에는 별로 쓸 말이 없다고 여겨지실 텐데요,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한 번 첫 줄을 써 보시면 그 이후로도 이어 붙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시계도 흔히 볼 수 있는 시계이지만, 글로 쓰기 시작하는 순간 저만의 시계가 되는 것처럼, 자신이 가진 평범한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이 되기도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물건이 있으시다면, 한 번 글을 쓰셔서 의미를 더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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