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과 인생

가장 중요한 문제

by 정필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좋은 것인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긴 한가. ‘나’라는 자아가 있기 전에 나는 생겨났다. 부모도 ‘나’를 예상하고 품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살아간다. ‘나’란 무엇인가. 왜 태어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살게 된다. 살면서 ‘나’라고 불릴 만한 특성을 갖게 되지만, 특징들을 모은다고 내가 되지는 않는다. 모든 인간은 한 번쯤 이 질문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누구의 아들 혹은 딸, 직업, 혹은 흥미나 적성 같은 것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설명 가능한 존재인가. 나의 성격적 특성들을 나열해 본다. 침착함, 신중함, 조용함, 진취적, 이런 단어는 나를 설명하기에 충분한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 모든 것들이 ‘나’이기 때문에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태어난 이유에 대해서 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남들이 추구하는 대로 안정적인 삶과 높은 지위를 꿈꿨다.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뭐든 열심히 했다. 아홉 시 뉴스에 보도될 만큼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럭저럭 나쁠 것 없고 불안해 보일 것 없는 인생이었다.


직장인이 되었다. 종신고용이 없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당장 해고될 위험이 있는 직장은 아니었다. 급여가 밀리는 일 없이 나왔고, 일도 적성에 꼭 맞지는 않았으나 꽤나 인정받으며 임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높은 자리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 편으로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세운 삶의 계획서 마지막 문장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까지밖에 없었다. 모든 조건을 갖추었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는데,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삶을 모두 살고 내게 허락된 시간의 끝에 섰을 때, 과거를 돌아보며 좋은 삶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표준에 못 미치는 인생도 아니었고, 나 스스로도 만족하며 살 만한 인생이었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는 듯했다. 나는 일자리를 통해 돈을 벌어 안정적인 인생을 살고자 애썼고, 초기 조건을 갖추는 데 까지는 다가갔으나 거기서 돌아 나와야 했다. 대단한 부자가 될 수 없어서, 임원이 될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돈을 위해 살고, 명예를 위해 사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 표준을 위해서 일평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을 포장하고 꾸미기 위해서 일생을 다 바친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서 이것들을 본다면, 살만한 인생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흔히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죽음을 기억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죽음은 먼 일처럼 여겨지고, 생활은 눈앞에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모험이라면, 길을 갈 땐 북극성을 보며 방향을 찾아야 하는데 눈앞에 손바닥을 갖다 대는 꼴이다. 방향을 가리키는 별을 보아야 하는데 자꾸 손금만 쳐다보고 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가야 할 방향을 보아야 한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여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길을 잃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길을 잃을 뿐만 아니라 길을 갈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인생이 마라톤쯤이라면 눈을 가리고 천천히 트랙을 따라 걷는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허나 인생이 여정이고 또한 모험이라면 눈을 가린 채로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지 않는 인생도 이와 같다.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속도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 삶을 비추어 본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 나와서, 자기만의 시간을 살다가 죽게 되는 것이 모든 이의 삶이다. 저마다 다른 크기의 모래시계 하나씩을 가지고 산다.


죽으면 단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을 위해 평생을 산다면 그것만큼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인생이 귀한 것이라면, 적어도 그보다 못한 것을 위해서는 살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5천 원짜리 지폐와 천 원짜리 지폐를 바꾸는 사람은 없다.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평생 사치품을 포장해 명품인 양 팔아치우고, 잠시의 행복을 준다는 미명하에 숨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내 인생을 다 써버리고 나면, 인생의 시간 끝단에 서서 나는 삶을 어떻게 회상할 것인가. 죽음을 통과할 때 내 삶이 남긴 부산물들은 다 타서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무서웠다.


이것이 나의 한계였다.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왜 태어나는지도,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단 하나 없으며,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죽지 않을 방법도 없다. 젊은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도 생각해 보았으나 오히려 죽음이라는 주제는 젊은이가 생각하기에 더 가치 있는 주제인 듯싶었다. 나는 죽음 앞에 서서 신을 찾았다. 삶을 멈추고 신께 묻기 위해 멈추었다. 지난 삶의 형태를 모두 버리고, 내가 의지하던 것들을 내려놓았다. 직장의 안정성도, 급여도 내 삶을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그 무엇도 죽음의 불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생명이 끊어진 내 육신도 그러할 것이며, 내가 세상에서 그러모은 재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을 내게 허락하신 신께 물어야 했다.


의미와 만족을 찾는 세상이다. 소셜 미디어를 조금만 둘러보아도 금세 알 수 있다. 일명 ‘갓생’을 살아보려 애쓰기도 하고, ‘욜로’로 대표되는 소비를 통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보려고도 한다. 하지만 물건이 주는 즐거움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요즘 ‘아이패드병’이라는 말이 생겼다. 아이패드를 사고 싶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가격 정보를 확인하고, 활용법을 검색하게 되는 병이다. 이 병은 물건을 사면 낫는다. 그러나 이렇게 사 모은 물건이 얼마나 만족을 주는가? 아무리 비싸고 값진 물건도 만족감이 몇 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물건을 사면 금세 싫증이 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오히려 ‘병’에 걸려 매일 정보를 찾아볼 때가 더 행복하다. 만일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다 해도 내가 산 물건을 기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임종을 앞둔 노인이 건강할 때 사 둔 스포츠카를 아직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물건뿐 아니다. ‘갓생’ 트렌드로 대표되는 자기 계발은 어떤가. 끊임없이 갖추라고 말한다. 삶에 필요한 능력들을 하나둘씩 채워 넣으라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들을 한 데 그러모아서 성공의 지름길이라며 이 모든 것을 갖추라고 말한다.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마음만 먹으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년이 지날수록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었다. 어릴 때 내 부모님은 나를 영재로 여겼다. 의사도 되고 판검사도 되고, 과학자도 되고 대통령도 될 인재라고 생각하셨다. 더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나는 가능한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더 많은 것을 삶에 채워 넣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가능한 모든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알맞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가치의 전도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지금에도 들어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나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들을 오히려 중요한 삶의 문제로 여겼다. ‘뭣이 중헌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등 많은 경구들은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 때문에 죽을 것인가. 일에서의 방황은 올바른 커리어를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다.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어디서 만족을 찾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내 여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누구든 삶의 의미를 찾는 일, 자신에게 적합한 직업을 갖는 일이 쉽다고 말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그 사람은 사기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며, 죽음 앞에 서서 삶을 직시할 때만 더듬어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삶을 허락하신 분이 없다면 이 모든 수고는 의미가 없다. 만든 이 가 없는데 용도가 어디 있겠으며, 용도 없는 도구가 어찌 쓰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어느 노래 가사처럼,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쿨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다. 정말 그게 끝이었다면, 어찌하여 세상은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찾는 사람들로 넘쳐 나는가.


죽음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기는 것은 술에 취해 누리는 즐거움 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가을 무렵, 한 번쯤 죽음을 떠올려 보며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여 끝없이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둘씩 빼서 진정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을 남겨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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