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는 나의 힘
“자기, 저기 봐”
“뭐?”
“자고 있어 저기.”
“잘 수도 있지.”
맞다. 잘 수도 있다.
토요일을 맞아 아내와 카페로 나왔다. 토요일의 내 일과는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읽고 쓰는 일 두 가지이므로 카페만큼 안성맞춤인 장소가 없다. 열한 시 반에 오픈하는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열두 시 반쯤 카페에 들어왔을 때, 창가 쪽 햇살이 따사롭게 들어오는 자리에 남녀 한 쌍이 잠을 자고 있었다. 여자는 패딩을 껴 입고 신발을 신은 채 카페 의자에 발을 올려 쪼그린 모습으로 자고 있었고, 옆에 남자는 검정 후리스에 축구 반바지를 입고 벽면 기둥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음료 잔은 없고 먹다 만 케익만 있는 걸로 봐서 조각 케익 하나만 시켜서 자릿세를 대신한 것 같다. 정 피곤하면 자는 데 장소가 딱히 있는 건 아니니 상관은 없다만, 두 시가 넘은 지금까지도 창가의 한 쌍은 자고 있다. 여자는 이따금 깨서 핸드폰을 만지다가 다시 잠에 들곤 했지만, 남자는 지금까지 한 차례도 깨지 않고 잠들어 있다.
아무리 봐도 둘 다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안 보인다. 카페에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시간 내내 잔다는 게 특이하게 여겨지기는 한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밤을 샌 거면 집에 가서 잠을 자야 할 것인데, 둘은 무슨 사연으로 주말 오전부터 카페에 앉아 케익 한 조각을 시켜놓고 부족한 잠을 채워야 했을까? 그리고 아무리 제주도라지만, 반바지가 왠 말인가.
“가서 물어볼까?”
“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궁금하면 물어보던가, 대신 날 아는척 하지는 말고.”
맞다. 내가 좀 오버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가 길바닥도 아니고, 저들이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닌 데 가서 뭐라고 할 것인가.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 나서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혹시나 조금 더 지켜보다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면 도움을 줘도 될 것 같다. 두 시간 정도 자고 나니 잠이 좀 깨는지 남학생이 뒤척이며 무어라고 말을 한다. 가만 보니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괜히 오버하는 아저씨는 되지 말아야지.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최신형 기능이 탑재된 핸드폰, 새로 나온 차량, 컴퓨터, 이런 것들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핸드폰은 전화하고 카카오톡 보낼 만한 정도면 되고, 차량은 이동 수단으로써 역할을 충실히 해 주면 그뿐이다. 컴퓨터도 그저 글을 쓸 수 있을만한 사양이면 충분하다. 물건 욕심도 별로 없고, 관심도 없다. 나의 제일가는 관심사는 사람이다. 길을 가다가 누가 막 떠드는 소리에 괜히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이따금씩 아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다. 본인도 모르게 자주 쓰는 말이나 특징적인 행동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사람마다 쓰는 말이 다르다는 점에 흥미를 느끼고, 같은 단어를 다르게 이해한다는 점에도 흥미를 느낀다. 물건은 저마다 비슷한 용도인데 반해서, 사람은 만나는 사람마다 새롭지 않은 사람이 없다.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내게는 개별적 존재이다.
가만 보니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흔히들 가지고 노는 자동차 장난감이나 레고 같은 것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활발한 성격은 못 되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소수의 친구들과 아주 가까이 지냈고 사람들의 말이나 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읽는 글도 전부 사람에 관한 것들이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궁금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아내를 좀 더 궁금해했던 때문에,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한창 연애 중이던 대학생 때, 아내가 내게 말했다. “너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나한테서 빛이 나는 것 같아.” 사실 이 글을 빌려 고백하자면 나는 저 말을 ‘나한테서 빛이 난다’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마치 내가 말을 하는 모습이 아내에겐 빛나는 모습으로 비쳤겠거니 하며 거진 8년 동안을 믿었는데, 결혼하고 보니 사실 아내 자신이 빛이 나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내가 아내를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마음이 전달된 것일 테다.
요즘은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일과 진로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년들, 그리고 사회 초년생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어떤 과정으로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일이 즐거운지, 이 일을 잘하게 되면 자신이 더 좋아질 것 같은지 같은 것들이 궁금하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사는 게 원래 이런 거 아니냐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이제까지의 삶을 살펴본 결과, 궁금해하는 것이 나의 힘이다.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사람을 매정하게 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처럼 여기고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어 보인다. 그리고 서서히 보석처럼 변해 간다. 남에 대해서도 그렇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자세로 대한다. 한 번도 반복된 적 없는 인생, 그리고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나를 궁금해한다. 보석처럼 여기고 삶의 가장 소중한 자원들로 내게 아끼지 않고 투자한다.
궁금함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돕는 인생을 살고 싶다. 궁금해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며, 기대를 품는다는 뜻이다. ‘나 이미 너 다 알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타인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어차피 뻔하다.’ 고 생각하거나 이미 상대를 모두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상대를 틀에 가둔다. ‘내가 배워본 결과로는’, ‘내가 경험한 결과로는’ 같은 말들을 하며 상대도 뻔하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이게 바로 ‘라떼는 말이야.’ 다. 학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학벌의 틀로 상대를 바라보고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경험으로 상대를 모두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라는 틀에 상대를 집어넣는다. 이는 지대한 착각이다. 모든 개인은 타인이 대체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살아온 얄팍한 틀로 상대를 모두 재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내게도 상대를 내 틀속에 넣으려는 안일한 생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상대방의 틀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다. 나 자신으로 온전하게 나를 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들이 나를 봐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도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싶다. 누구도 하나의 틀에 모두 담기는 사람은 없다.
내 꿈은 아내가 느꼈던 ‘빛이 나는 것 같다.’는 기분을 다른 이에게도 선물하는 것이다. 내 삶의 전부를 사용해서 몇 명이라도 그런 기분을 한 번이라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멋진 삶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타인을 격려하는 모양이 되었으면 좋겠고, 용기를 내게 하는 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으로 내 말과 글이 남아서 사람을 일으키고 격려하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을 계속 궁금해할 예정이다. 그리고 공부도 더 할 예정이다. 나의 온 존재로 이야기해주고 싶다. ‘당신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야.’, ‘당신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아.’, ‘나는 정말 당신이 흥미롭고 궁금해.’, ‘와, 정말 당신다워.’. 마음을 담은 감탄사를 전하고 싶다.
만남이 좋다. 사람마다 새롭다. 어쩜 이렇게 새로운 인생이 있을까. 흥미롭다. 대면하여 만나기도 하고, 글로 만나기도 한다. 내가 사는 세계는 여러 사람이 저마다 고유한 빛을 가진 세계다.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이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카페 구석에서 잠자는 학생들을 궁금해한다. 만난 지 11년이나 된 아내도 아직도 궁금하고, 평생 나를 키워 준 엄마와 내 혈육도 아직까지 궁금하다. 날마다 새롭다. 태양을 보며 신나서 펄쩍펄쩍 뛰던 그리스인 조르바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벅찬 궁금함을 동력으로 삼아 살고 싶다.
그래서 읽는 게 좋고 생각하는 게 좋고 쓰는 게 좋은가 보다. 읽으면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다. 다른 삶의 형태, 생각, 쓰는 말을 아는 게 재미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나도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쓰는 건 나 자신에 대한 궁금증을 표하는 방법이다. 내게 질문을 던지고, 나를 더 알아가는 과정이다. 때로 읽기와 쓰기라는 과정이 지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커다란 보상을 알기에 제 발로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브런치가 좋다. 글이 좋다. 주말 오후 덩어리 시간을 가지고 읽고, 쓰는 일에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 중에 하나이다.
아이와 노인의 가장 큰 차이는 ‘궁금함’이다. 어린아이는 질문과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아빠, 하늘은 왜 파래요?’, ‘엄마, 왜 강아지는 멍멍하고 울어요?’, ‘우와, 눈이 와요.’, ‘와 하늘에 구름 좀 봐요!’. 반면 노인은 어떤가. 심드렁하다. 삶이 반복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 다 경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눈 좀 오는 것 가지고 호들갑이냐.’, ‘에휴, 눈 오면 바닥 미끄러운데.’, ‘구름이 뭐 어쨌다는 말이냐.’, ‘거 개 짖는 소리 한 번 시끄럽네.’ 그렇지 않은가? 아이와 노인의 가장 큰 차이는 생물학적인 노화가 아니다. 마음에 있다. 어제 겪은 것이 오늘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삶은 심드렁해진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게서 나던 빛은 사라져 버린다.
아이와 같이 호기심 많은 노인이 되어 가고 싶다. 아이의 호기심을 유지하되, 어른의 지혜를 배워 가고 싶다. 상상만 해도 멋진 어른이 될 것 같다. 삶을 뻔하게 여기면 정말 삶이 뻔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이상하지 않다면 이미 빛이 사라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날마다 새롭고, 내 앞에 놓인 삶도 날마다 새로운 것이다. 만남도 그렇다. 궁금함, 호기심, 신선함을 가득 안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두 시간가량 잠을 자던 커플은 갑자기 일어나더니 가방을 주섬 주섬 챙겨 카페 문을 나섰다. 둘은 카페 문을 나서자마자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아무리 봐도 내 눈으론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다. 데이트를 할 거면 잠을 안 잤을 것 같은데 말이다.
“가서 물어볼까?”
“뭘?”
그러게, 뭘 물어본다는 말인지. 피식 웃어넘긴다. 내가 겪어본 건 아니지만 저런 주말 오전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흥미로운 오후다. 때마침 머리에 두건을 두른 중동 스타일의 두 여성이 카페로 들어선다. 지금은 주말 오후, 이곳은 제주의 어느 카페이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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