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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yton Jan 06. 2018

원예 도서관

Helen Crocker Russell Library


식물원을 나오는 길에 낮은 단층 건물이 보였다. 브로셔 지도에 매표소 옆 작은 건물이 하나 그려져 있고 아래에 도서관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곳 같았다. 문을 열었더니, 단정한 와인색 카디건을 입은 아주머니가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긴 반백의 머리카락을 참 우아하게도 틀어 올렸다. 서양 사람들은 중년 이후에는 머리색이 꼭 은발처럼 보인다. 만화 속 수줍고 귀여운 여자 주인공의 자상한 외할머니처럼 이런 캐릭터는 꼭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여야 하더라. 아주머니는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고서는 들어갈 거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니 아담한 나무 상자를 가리켰다. '가방은 여기 두세요.' 오래되어 바니시를 몇 번은 거듭 칠했을 것 같은 나무 상자였다. 이런 색 참 따뜻하다. 건축물이나 가구에 쓰인 좋은 목재를 보면, 한눈에 수종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아마 산길을 오르다 보이는 모든 야생화 이름을 알 수 있게 될 확률과 비슷한 바람일 테지. 가방에 묻은 빗물을 툭툭 쳐내고 상자에 넣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봄이 오는 날씨가 너무 변덕스럽다고 했다. 일교차가 큰 데다 정오에도 해는 나지 않고, 비까지 내리니 하루 종일 히터를 틀어야 한단다. 샌프란시스코의 요상한 봄 날씨에 대한 귀여운 푸념으로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추웠다.

가방을 다시 꺼내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아무렇게나 둘둘 말았다. 머리와 옷에 묻은 빗방울이 마르면서 체온을 뺏아가고 있었다. 기온 차가 많이 나는 계절에는 스카프처럼 유용한 아이템이 없다. 이거 좀 촌스러워 보일 것 같은데…. 비 내리는 평일 낮, 도서관은 거의 비어 있었다. 비에 젖어 턱까지 스카프를 말고 두리번거리는 이방인에게 관심을 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겹겹이 책이 쌓인 어두운 코너에 한 남자가 숨어 있었다. 이런 구석에 사람이 있을 줄이야. 헤드폰을 낀 채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시 보니 집중이 잘 될만한 아늑한 구석이긴 했다. 수염이 풍성한 다른 중년 남성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책상 중앙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노트가 아니라 책이었는데, 만년필로 무언가를 열심히 덧붙임 해 적고 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

마음에 드는 케케묵은 그 냄새.


낡은 도서관에 쌓인 세월의 나이테가 꽤 묵직해 보였다. 나무와 곤충, 야생초와 들꽃들에 대한 책이 가득했다. 그들을 가공해 만든 약초의 의학적 기능과 건강에 좋은 영양학적 효능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탐구를 모아 엮어낸 도감도 있었다. 식물에 대한 온갖 연구가 고스란히 기록된 고서들이 온 사방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키 큰 책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책들은 도서관 곳곳에 배치된 낮은 수납장에 자리를 잡았다. 고풍스러운 공기가 주변을 흘러 지나갔다. 문득 한국에서도 우리 동네, 그것도 집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 문턱을 넘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잎사귀, 꽃잎, 줄기 하나하나….

저자가 직접 그려 넣어 만든 책, 단순한 표지에 흑백의 정원 사진으로 채워진 소박한 책, 화려한 표지에 끌려 펼쳤다 깨알같이 그득한 생태학 이론에 얼른 덮어버린 책,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담은 책.





안 그래도 눈 둘 곳이 너무 많은데 벽 사이사이에 걸린 앤틱한 액자까지 내 시선을 자꾸 잡아당겼다. 고요하나 단조롭지 않은 공간이었다. 평면의 종이에 담긴 꽃과 곤충들이었지만 충분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잠깐 책장 사이로 난 통로 중간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 여정이 정해지지 않은 그 순간만큼은 나는 시간 부자였다.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몇 시인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아직 화가 덜 풀린 구름이 쏟아내는 빗줄기가 높은 층고를 따라 길쭉하게 뻗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투둑 투둑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도 좋았다.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글의 한가운데 불시착한 기분으로 밀림처럼 우거진 책장 속의 서적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어쩜 이렇게 여백도 없이 잘 끼워 두었을까- 싶은 어느 칸에 이르러 마침내 한 권을 뽑아내서 성큼성큼. 사실은 아까부터 계속 앉고 싶던 도서관 중앙 테이블 자리로 가져갔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던가. 그곳은 마침 내가 앉아야 할 자리였고 그 순간은 바로 그 책을 읽어야 할 때였다.



The Complete Woman's Herbal, Anne McIntyre

첫 장을 펼치자 막 잡초를 깎아내었을 때 나는 신선하고 비릿한 녹색의 풀향기가 났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길을 적실 때 맡았던 흙냄새도 났다. 눈을 통해 전달된 한낱 작은 그림이 너무 쉽게 뇌를 속여 버린다. 속아 넘어간 뇌가 주는 신호에 코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순진한 감각기관 같으니라고.


평소 많이 들어보았던 식물들의 잎, 꽃, 열매, 뿌리들이 이런 효능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었다. 저자가 어찌나 공들여 그림을 그려 놓았는지, 글을 읽다가도 다시 삽화를 한참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연필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가늘고 긴 줄기가 생겨났고 마디마다 작은 잎사귀가 자라났다. 머지않아 그 사이로 잔 꽃망울이 맺혔다. 며칠 낮의 햇빛과 그만큼의 밤바람, 그리고 새벽의 이슬을 머금고 마침내 꽃이 피어났다. 마치 씨앗을 뿌린 땅을 살피는 농부의 마음처럼 정성스러운 연필선과 붓끝이 스친 곳에 탐스러운 열매가 맺혔다.




아름답고 섬세한 풀 한 포기, 꽃송이 하나하나 모두가 작품이었다. 어디에서나 고화질 이미지와 HD 영상에 둘러싸인 요즘 그린이의 정서가 느껴지는 손그림을 만나는 게 참 반갑다. 무려 22년 전인 1995년에 출판된, 여성을 위한 허브의 효능과 요법을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는 영국의 약초학자이자 대체의학가인 앤 맥킨타이어(Anne McIntyre)로 지금까지 꽤 많은 원예학 및 대체의학서적을 집필했다.


The Complete Woman's Herbal (1995)
A Manual of Healing Herbs and Nutrition for Personal Well-Being and Family Care
Author : Anne McIntyre (http://annemcintyre.com/)



고개를 드니,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맞은편 책 위에 글을 적고 있던 중년 남자는 자리를 뜨고 없고 대신 어떤 노부부가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겉옷에 물기가 맺혀있는 걸 봐서, 나처럼 공원에 산책을 나왔다가 비를 피해 도서관에 들른 모양이다. 그만 나가볼까-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사서로 보이는 입구의 관리자에게 도서관 엽서가 있는지 물었다. 판매용이라도 상관없다고 했더니 잠시만 기다리란다.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곧 갈색 엽서 한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찾으셨군요!'

'도서관 기념엽서는 아니고 식물 전시회 홍보 엽서예요. 요즘엔 엽서를 찾는 사람이 없어서….

아, 두 개 가져갈래요? 많이 가져가도 괜찮아요.'


수수한 그림이 그려진 예쁜 엽서였다. 고맙다고 했더니 여행하는 동안 또 오란다. 늘 그렇듯 그러겠다고 했지만 기약은 할 수 없다. 언젠가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오게 되면 또 올게요-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닮은 오후였다.


Helen Crocker Russell Library of Horticulture, Golden Gate Park, San Fransisco, CA,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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