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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yton Jan 15. 2018

리스본의 아파트

An Apartment in Lisbon


#01

포르텔라 공항에 도착해서 택시에 몸을 실은 시각은 자정에 가까웠다.

택시기사는 낮에는 본업이 있고 밤에는 택시를 몰아서 부수입을 번다는 선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택시 운전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리스본 시내의 지리를 잘 모르니, 길을 찾느라 원래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출발 전 숙소 예약서에 적힌 주소를 뚫어져라 쳐다볼 때 어느 정도는 눈치챘었다. 한밤중에 낯선 도시에 도착한 여행자와 생계를 위해 새벽까지 택시를 모는 청년은 서로를 위해 기꺼이 타협했다.


예약한 아파트가 시내 깊숙이 위치한 주택가라서 그런지 택시는 자꾸만 구불구불한 언덕을 따라 올라갔고, 빗방울까지 차창을 타고 흐르자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이국적이던 리스본의 밤 풍경이 삭막하고 고독한 도시의 뒷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다 어느 일방통행로에서 막다른 길을 만나자 택시는 기어이 서버렸다. 기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가서 근처의 행인과 이야기를 했고, 차에서 내릴 때보다 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서툰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차량 진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지금 온 길을 다시 되돌아 나가야 한다고, 리스본에는 이런 길이 너무 많아서 운전이 어렵다고도 했다. 안 그래도 늦은 시간인데 더 지체되어 정말 미안하다고 지금부터는 미터기를 끄겠다며 재차 사과했다. 나는 이 사람 좋은 초보 택시기사를 구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Lisbon, Portugal

#02

지도를 보니 걸어갈 수 있는 거리 같았고, 길을 돌아가서 헤매다 더 늦어지면 체크인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숙소 주인과 연락하겠다고 여기서 내려달라고 했다. 기사는 정말 찾아갈 수 있겠냐고 의심 반 걱정 반으로 물었고,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흔들며 문명의 이기를 활용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돌아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비를 피해 어느 식당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서 예약서에 기재된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호기롭게 택시를 보낸 처음의 의지와는 달리 지도를 확인한 후 튀어나온 내 첫마디는 '도대체 내가 어디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겠다'였다. 핸드폰 너머의 숙소 직원으로 생각되는 남자는 상황을 바로 알아채고는 근처의 술집 이름을 알려주며, 찾기 쉬울 테니 일단 그곳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행히 늦게까지 영업 중인 붉은 간판의 재즈바를 찾았고, 십 여분쯤 기다리자 머리에 두건을 묶은 호리호리한 남자가 내 이름을 물으며 다가왔다. 예약한 사람이라고 하자 자신의 우산을 내게 건네주고는 오래된 돌길 위로 두 개의 트렁크를 끌고 앞서갔다. 우리는 부슬비를 맞으며 인적이라곤 없는 어둑한 골목을 걸어갔다. 문득 내가 잘 못 예약한 게 아닐까, 과연 이런 후미진 주택가에 제대로 된 숙소가 있는 게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03

열세 시간의 비행과 사십 분의 택시 이동, 이십 분의 골목길 투어 후, 비까지 맞으며 완벽하게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채로 어느 비탈진 계단 길의 가장 끝에 위치한 낡은 주택에 이르렀다. 남자는 무겁고 큰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다 왔다며 이곳의 삼 층이라고 했다. 익숙한 듯 목조 계단을 쿵쾅대며 올라가는 직원의 뒤를 따라 꼭대기 층에 다다르자 유리로 된 현관이 나왔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숙소 내부의 모습에 우리는 반쯤 할 말을 잃었다. 충분한 여백이 주는 내부는 텅 빈 것 같으면서도 안락한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공간을 형성하는 희고 투명한 유리벽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쪽마루와 나무 목재, 패브릭이 주는 균일한 질감이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누구의 취향일까.



가방을 내려놓은 직원은 비에 젖고 지쳐버린 우리가 안 돼 보였던지 빙긋 웃고는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화장실을 제외한 나머지 벽이 유리로 마감된 독특한 구조의 아파트를 안내해주며, 지금은 비가 오지만 날이 개면 발코니에서 꽤 근사한 시티뷰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파트를 예약하면서 현지 도착시각이 늦어 메일로 다음 날 아침에 먹을거리를 사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요청한 목록에 대한 구매 영수증을 건네주며 주방에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 오늘은 푹 쉬라고 했다. 내일 아침을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에 숙소 직원이 일급 호텔의 퍼스널 컨시어지로 보이기 시작하던 순간, 자기는 아파트 주인이 운영하는 포르타스 도 솔 광장 (Largo Das Portas do Sol) 근처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고, 무료 음료권을 전해주며 우리를 현실 세계로 되돌려놓고 아파트를 나갔다. 숙소를 찾던 당시, 시내 접근성이 높으면서 가성비가 좋은 곳은 이미 모두 예약 완료된 상태라, 예산 초과에도 결제할 수밖에 없었던 이 아파트는 내 예상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리고 포르투갈 여행에서 가장 호화로운 숙소였다. 이곳에서 초과된 예산은 이후 포르투 (Porto)의 한 숙소에서 메꾸게 되었는데, 다른 도시에 비해 유독 저렴했던 그곳은 방과 방 사이의 벽이 존재 의미가 거의 없었던 고난의 추억이 되었다.



#04

리스본을 떠나던 날, 체크아웃을 위해 주인이 직접 아파트로 왔다.

깔끔한 회갈색 재킷과 흰 셔츠를 입은 중년의 남자는 머무는 동안 자신의 아파트가 편안했냐고 물으며, 잘 포장된 와인 한 병을 내밀었다. 옷차림을 보아 미루어 짐작컨대, 아파트의 인테리어는 주인의 취향인 게 분명했다. 당시 손님들에게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 부족한 점도 알려달라고 했다. 리스본의 일정을 그리 길게 잡지 않은 탓에 주인이 운영한다는 식당을 들르지 못했다. 머무는 내내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체력을 아끼기 위해 방문하고 싶은 곳은 해를 따라 움직여야 했는데, 동선에 없던 레스토랑에 들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목적지에 닿고자 하는 욕구에 하늘이 응해주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다. 사실 여느 유럽의 도시가 그렇듯 관광지로 상업화된 리스본의 거리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든 쉽게 카페를 찾을 수 있었다. 지중해와 가까운 지형적 특성으로 스페인과 비슷하게 주스류, 특히 직접 갈아 내려주는 오렌지 주스의 신선도가 무척 높았다. 조망으로 유명하다는 집주인의 식당이 조금 궁금하긴 했어도 방문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은 크게 남지 않았다. 아마 그 때문에 주인이 와인을 들고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여행 중 한 번에 다 마실 수 없어, 와인은 포르투갈 여행 내내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한국까지 건너와 친구에게 선물했다. 내게 리스본의 첫 숙소는 포르투갈에 대한 첫인상이었고, 비록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 덕분에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 첫인상만큼은 친절하고 포근했다.

Oriente Station (Gare do Oriente), Lisbon


#05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은 영화. 바다 건너 포르투갈로의 여정은 아마도 영화가 끝나고도 차마 화면을 끄지 못한 채 멈춰버렸던 그 새벽의 긴 여운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스위스의 철학가이자 베를린 대학교수인 페터 비에리 (Peter Bieri)의 원작을 덴마크 출신의 감독 빌 어거스트 (Bille August)가 영화로 제작했다. 배우 제러미 아이언스 (Jeremy John Irons)가 주인공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가진 내면의 모순과 갈등을 선 굵은 연기로 풀어냈다. 독재 체제 아래, 정치적 이념에 짓눌려 억압당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개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저항'이라는 행위로 시대에 맞서는 등장인물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한 계기로 그들의 엇갈린 운명을 좇는 문학교사 라이문트의 일탈을 뒤따라 가다 보면, 삶이 가지는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다. 포르투갈의 색채 문화가 고전적인 스타일로 묻어나는 영화는 시각적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그 흥행에 힘입어 현지에는 영화에 나온 코스를 방문하는 씨티 투어도 있다고 한다.


Night Train to Lisbon (2013)


라이문트의 독백│Raimund Gregorius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 놀라운 고요함 속엔 고결함이 있다.

The decisive moments of life, when its direction changes forever, are not always marked by loud and shrill dramatics. In truth, the dramatic moments of a life-determining experience are often unbelievable low key. When it unfolds its revolutionary effect and ensures that a life is revealed in a brand-new light, it does that silently and in this wonderful silence resides its special nobility.


아마데우의 독백│Amadeu do Prado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그저 공간을 떠날 뿐, 떠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곳에 머무른다. 그리고 오직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스친 장소에 이르면, 우리 스스로를 향한 여행이 시작된다. 그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 길에서 외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미리 단념하게 되는 걸까? 인생의 끝에서 후회할만한 모든 일들을….

We leave something of ourselves behind when we leave a place. We stay there, even though we go away. And there are things in us that we can find again only by going back there. We travel to ourselves when we go to a place that we have covered a stretch of our life, no matter how brief it may have been. But by travelling to ourselves, we must confront our own loneliness. And isn't it so that everything we do is done out of fear of loneliness? Isn't that why we renounce all the things we will regret at the end of ou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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