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잃어버린 영혼
작가 : 올가 토카르축 글.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이지원 옮김.
출판사 : 사계절
한낮의 겨울입니다. 공원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습니다. 공원 한쪽에서는 완전히 얼어버린 호수에서 아이스하키를 하거나 스케이트,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사람들, 쌓인 눈에 신난 강아지,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암호처럼 찍혀 있습니다. 하지만 넓은 공원에서 발자국이 찍힌 곳은 일부분이고 나머지는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순백의 대지입니다.
공원에는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하루가 저물어가는 것에 아쉬워하며 눈사람을 만들거나 썰매를 끌며 서성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짙은 어둠이 깔린 공원 벤치에는 서로의 시린 손을 챙겨주는 어린 연인과 놀이가 끝난 손주의 아쉬움을 달래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벤치 주위로 늦은 퇴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공원에 밤이 찾아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에 세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발밑에 스케이트를 벗어 둔 아이는 한낮부터 공원에 있었습니다. 스케이트도 타고, 썰매도 타고, 서로의 시린 손을 챙겨주던 어린 연인이 가버리고도 공원에 남아 새로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곁에 개를 데리고 늦은 산책을 나온 여인이 있습니다.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카페 안, 한 남자가 거울을 뒤로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 남자는 어느 날 출장 중에 모든 기억을 잊어버립니다. 간신히 자신의 이름이 얀이라는 것만 알아챕니다. 현명한 의사를 찾아간 얀은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잃어버린 남자의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한 곳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처방을 받습니다.
얀은 잘 보이지 않지만, 트레싱지를 살짝 넘기면 나타나는 우거진 숲 속에 작은 집을 마련합니다. 집까지 나 있는 흙길 주변으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오래되고 사람의 발걸음이 거의 없어 보이는 집입니다.
지난겨울, 하얀 눈이 쌓였던 공원에도 어느덧 풍성한 녹음이 찾아왔습니다.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벤치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꽃무늬가 양각된 불투명한 현관 유리문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에 가로등이 길을 밝힙니다. 사람들이 집으로 향하는 가운데 한 아이가 창가에 불이 켜진 집들을 바라봅니다. 그 시각, 긴 구레나룻에 콧수염을 기른 얀이 차(tea)를 만들고 있습니다. 네모난 작은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습니다. 식탁 아래에 화분이 있고 신기하게도 식탁에서도 꽃이 자랍니다. 식탁보와 의자에도 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른들이 드나드는 카페에 한 아이가 홀로 빙수를 먹고 있습니다. 얀의 식탁 위에는 차 세트, 접시에 담긴 빵, 작은 화분과 토끼가 앉아 있습니다. 의자 위에는 사슴이 올라가 있습니다. 펼쳐진 커튼 사이로 집 앞 숲이 보이는데 정작 얀은 자리에 없습니다.
한 집에서 파티가 열렸습니다. 악기 연주자의 연주에 따라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춤 상대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 한쪽 구석에서 한 아이가 서성입니다. 그 사이 얀의 머리가 많이 자랐습니다. 차 세트와 식탁보, 의자는 변한 것이 없지만 텔레비전이 새로 생겼고 화분의 종류도 바뀌었습니다. 받침대로 쓰이는 잡지 위에는 식사가 담긴 냄비가 올려져 있고 얀은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바닷가 해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흙 놀이를 하기도 하고 파다 생물을 잡거나 파도에 쓸려온 나뭇가지를 가지고 놉니다. 엄마와 함께 온 아이는 신이 나는지 양팔을 벌리고 뛰어다닙니다. 얀의 머리는 더 길어졌고 턱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랐습니다. 텔레비전이 없어졌고 의자가 많이 늘었습니다. 각각의 의자 앞에는 찻잔과 스푼이 놓여 있습니다. 손님이 왔다 간 것인지 손님을 기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테이블 중앙의 화병 담긴 꽃은 아주 높다랗게 자랐습니다.
노을이 지고 있습니다. 아이는 달리는 기차 창가에 서서 지평선으로 내려앉고 있는 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얀의 머리와 턱수염은 더 길어졌습니다. 식탁은 변함없지만 의자는 다시 두 개로 줄었습니다. 안경을 쓰고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식탁 위에는 새로운 식물이 화병과 화분에서 자라납니다. 전에 없던 고양이 한 마리가 식탁 위에서 접시에 담긴 물을 먹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나무들은 모든 잎을 떨구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난 길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얀의 집 창으로도 변화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식탁 위의 식물들은 다시 바뀌었습니다. 차 세트는 여전하고 사슴 모양의 장식이 화분 사이를 노닙니다.
어느 오후입니다. 얀의 집 창가에 한 아이가 보입니다. 아이는 더럽고, 지치고 할퀴어져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차 세트가 있고 화병과 화분의 식물도 이전과 다른 품종입니다. 식탁보는 낡고 해져 실로 꿰맨 자국이 있습니다. 화분 옆에는 단추와 뜨개질 실과 바늘이 있습니다. 트레싱지를 활용하여 창을 통해 집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을 표현했습니다. 집안에는 의자에 앉아 풍성하게 자란 화분을 안고 있는 얀이 있습니다. 얀의 발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벽면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고 작은 책장에는 책과 화분들이 놓여 있습니다. 얀의 모습은 초록빛을 발하며 자라난 식물에 가려져 있습니다.
드디어 얀과 얀의 잃어버린 영혼이 만났습니다. 초록 식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무표정한 얀은 콧수염과 턱수염, 머리카락이 수북이 자라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소녀의 모습을 한 얀의 영혼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아주 오래전, 눈 내린 공원에서 밤늦게까지 벤치에 있던 소녀가 얀의 영혼이었습니다. 아마 그 공원에서 얀은 영혼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편지봉투에는 그동안 얀의 살아온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얀의 영혼은 그 공원에서부터 얀을 찾기 위해 오랜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영혼을 잃어버린 얀과 신체를 잃어버린 영혼의 삶은 지금까지 생기 없는 단색이었습니다. 짝을 되찾은 얀과 영혼은 나란히 의자에 앉아 미소 띤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얀의 집은 생명력 넘치는 초록의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화분과 화병에 담긴 식물들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고양이는 한가로이 누워 있고 화분 사이에 사슴 장식도 보입니다.
창밖으로 푸른 숲이 보입니다. 얀과 영혼은 보이지 않지만, 식탁에는 영혼이 벗어 놓은 외투와 벙어리장갑이 있습니다. 식탁의 식물들이 많이 늘더니 급기야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식물들이 온 집안에 가득합니다.
얀과 영혼은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얀은 영혼이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살지 않기 위해 조심했습니다. 초록이 가득한 숲 속에 붉은 지붕을 한 얀의 집이 보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이어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이 펄럭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호수에는 새들이 노닙니다.
얀은 숲 한 편에 구덩이를 파고 시계와 짐이 담긴 트렁크를 묻었는데 그곳에서 각양각색의 꽃이 화려하게 자라났습니다. 온 숲을 덮을 만큼 높이 자라나는 꽃은 얀과 영혼의 앞날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올가 토카르축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폴란드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합니다.
※ 매주 목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