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읽고, 쓰다 (9) - 틈만 나면

by 숨CHIP

제목 : 틈만 나면

작가 : 이순옥

출판사 : 길벗어린이



시멘트 바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아주 작은 틈이 생겼습니다. 보도블록에 설치된 상수도 맨홀 뚜껑의 작은 틈에서 초록의 풀이 자랍니다. 산비탈 아래쪽, 낮게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한 집의 옥상에는 장독대와 빨래가 널려 있습니다. 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산책을 나온 어르신들이 골목을 오갑니다. 시멘트 담벼락의 갈라진 틈에서도 초록을 발하는 풀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보도블록에 인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한 볼라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보도블록과 보도블록 사이의 틈에서도 낮게 풀이 자라고 볼라드와 보도블록 사이의 경계에서는 햇빛이 잘 드는지 볼라드 높이만큼 풀이 높게 자랍니다.


보도와 차도의 경계에 보일 듯 말 듯 하수도관이 숨어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버려진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음료수 캔, 병뚜껑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곳에서도 하얀 꽃망울을 맺은 풀이 자랍니다. 또 다른 보도와 차도의 경계에는 깊은 구멍을 품은 빗물받이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도로에 물이 차지 않게 하기 위해 설치된 구조물이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오래되면 그 안에서도 풀이 자라고 앙증맞은 하얀 꽃이 피어납니다.


전단지와 담배꽁초가 숨어 있는 보도 난간 아래의 낮은 틈에서도 키를 낮춘 풀이 자랍니다. 불법 홍보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생활 쓰레기 배출 장소로 이용되는 전봇대 밑동의 틈에서도 가늘고 여린 풀들이 무리를 이루고 하얀 꽃들을 활짝 피웁니다.

오래전에 지어진 낡은 기와지붕 아래 담벼락을 배경으로 다양한 종류의 화분들이 놓여 있고 커다란 식물들이 화분 안에서 넉넉하게 자랍니다. 화분의 메인 주인공은 커다란 식물이지만 그 식물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화분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보란 듯이 풀이 자라고 꽃도 핍니다.


공원 벤치 주위로 온갖 이름 모를 풀들이 앞다투어 자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보란 듯이 나무 벤치 사이의 틈을 뚫고 올라가 마치 이곳이 나의 자리임을 증명하는 풀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햇빛과 비바람을 견뎌오면서 낡고 삭아 버린 동네 구멍가게 지붕 위, 먼지가 쌓이고 쌓여 흙이 되고 그곳을 터전 삼아 하늘을 우러러보며 노란 꽃을 피우는 풀이 자랍니다.


어떤 장소든 아주 작은 틈과 물, 하늘이 있다면 풀은 자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바라봐 주는 이 없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과 자동차가 다니는 길의 경계에서도 자기 빛을 내며 꼿꼿이 풀은 자랍니다. 나른한 오후의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 한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곁에 있는 정류장 안내판 아래에서도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화사하게 꽃을 피운 풀이 자랍니다.


사람들이 오고 가고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길, 그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뿌리는 내린 풀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발에 밟혀 풀도 꽃도 납작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냅니다. 한쪽 나사가 떨어진 번호판, 바람 빠진 타이어. 고장 난 자동차 주위에는 담배꽁초들과 구겨진 담뱃갑, 일회용 음료수 컵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주위의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동차 배기구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오롯이 자라는 풀도 있습니다.

모녀가 한적한 공원에서 산책하고 있습니다. 공원 주위는 온통 아파트입니다. 아파트와 공원을 구분하기 위해 담이 설치되어 있고 그 담벼락 아래에서 넝쿨이 사방으로 뻗어나갑니다. 넝쿨은 타고 오를 벽이 있는 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오릅니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부드러워진 햇살에 구름이 모두 분홍으로 물들었습니다.


전봇대와 전봇대에 걸쳐있는 전선이 하늘에 금을 긋습니다. 하루 종일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기어 오른 넝쿨이 담벼락 가장 높은 곳에서 무리를 이루고 담장 너머 세상을 구경합니다. 붉게 변하는 노을을 배경으로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하늘을 향해 넝쿨손을 뻗어 봅니다. 춤을 추듯 저마다 다른 손짓으로 넝쿨이 뻗어나갑니다.


커다란 바위 아래에 터를 잡은 풀은 마치 바위를 밀어내듯 온몸이 꺾여도 씩씩하게 자랍니다. 그곳이 어디라도 내가 자라날 틈만 있다면 여린 풀들도 싹을 틔웁니다.


민들레씨 한 개가 바람을 타고 떠돌다 보도블록과 보도블록 사이의 틈으로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땅속으로 곧게 뿌리는 내린 민들레는 사람과 자전거가 다니는 시간에는 가장 낮은 자세로 아주 조금씩 잎을 펼칩니다. 쉬지 않고 뿌리와 잎을 키운 민들레는 사람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빛나는 별빛을 동무 삼아 부지런히 꽃대를 올리고 별빛처럼 노란 꽃을 피워냅니다.


이 책의 사용 연령은 0세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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