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읽고, 쓰다 (11) - 눈보라

by 숨CHIP

제목 : 눈보라

작가 : 강경수

출판사 : 창비




표지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생명체가 보입니다. 바로 오른편에 ‘북극곰 금지’ 팻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하얀 북극곰인 것 같습니다. 작가 소개 페이지에 아주 작은 유빙을 타고 위태롭게 바다에 떠 있는 북극곰이 있습니다.


북극의 밤입니다.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별들이 빛나고 있습니다. 사방이 얼음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눈이 녹아 진흙이 보이는 곳에 북극곰 한 마리가 서 있습니다. 이 곰은 눈보라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태어나서 얻은 이름입니다.


기후변화로 북국은 매년 따스해집니다. 이로 인해 빙하가 충분히 얼지 않습니다. 눈보라가 조각난 유빙을 타고 바다에 떠 있습니다. 멀리에 눈보라의 먹잇감인 바다사자와 바다표범이 보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저 넓은 바다가 꽁꽁 얼고 그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물범들을 사냥해야 하는데 바다가 얼지 않은 지금은 그저 바라만 볼 뿐입니다.


눈보라는 사냥을 하지 못해 점점 야위어 갔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의 불빛들이 보입니다.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눈보라는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갑니다. 인간들의 집은 설산이 병풍처럼 쳐진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탓에 모든 집이 기둥 위에 지어져 있고 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의 쓰레기통에는 온갖 것들이 버려져 있습니다. 그중에서 먹을만한 것을 찾던 눈보라는 살은 하나도 없고 뼈와 머리만 남은 생선 한 마리를 입에 물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얼룩무늬 곰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눈보라는 먹을 것을 찾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이나 얼룩무늬 곰 사진을 바라봤습니다.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나오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북극곰을 발견하고 소리칩니다. 그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 눈보라를 내쫓습니다. 아이들은 눈과 돌을 던지고, 어른들은 삽을 들고, 술에 취해 코가 빨개진 사냥꾼은 총을 들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북극곰이 마을에 내려오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굶주린 야생의 북극곰이 사람들을 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더 위험합니다. 날씨가 추울 때는 북극곰이 마을로 오지 않았다며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걱정했습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눈보라는 그만 발이 미끄러져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한참을 구르다 진흙탕 위에서야 멈추었습니다. 눈보라의 한쪽 팔은 진흙 범벅이 되었습니다. 눈보라는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다행히도 인간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습니다. 인간들에 쫓기고 진흙 범벅이 된 자신을 본 눈보라는 기운이 빠졌습니다. 그때 눈보라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눈보라는 검은 진흙을 한 움큼 쥐었습니다.


마을 공터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마을 입구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이를 본 다른 아이들도 같이 소리칩니다. 아이들의 소란에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입구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술을 마신 탓인지 벌건 얼굴로 낮잠을 자던 사냥꾼도 눈을 뜨고 아이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봅니다.


바다 위로 유유자적 떠다니는 유빙들과 석양빛을 받은 붉은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마을에 판다가 나타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판다를 신기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사람에게 공격적이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는 아이의 손을 핥아주자 사람들은 판다를 매우 반겼습니다. 단 한 사람, 사냥꾼만 빼고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판다 주위로 모여들어 쓰다듬고 사진을 찍습니다. 판다는 대나무만 먹는다고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북극은 대나무가 자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판다가 먹을만한 음식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눈보라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고기, 우유, 생선, 빵 등을 말끔히 먹어 치웠습니다. 마을사람 모두 판다를 좋아하지만 사냥꾼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눈보라는 단지 검은흙을 발랐을 뿐인데 사람들이 잘해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친절하고 따스한 환대에 취한 나머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북극의 조용한 마을은 판다의 출현으로 축제 분위기입니다. 더 나아가 판다를 마을의 마스코트로 삼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장에는 판다 동상이 세워지고 각종 판다 상품을 파는 상점도 생겼습니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판다를 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화가는 판다를 화폭에 담고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관광객으로 인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기대로 들떴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불편한 사냥꾼은 북극곰 금지 팻말 옆에서 낮부터 술을 마십니다.

마을 사람 모두 판다를 사랑 하였고 혹여 누군가 판다를 독차지 할까 봐 틈만 나면 판다를 껴안고, 쓰다듬고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과분한 사랑에 눈보라는 하늘을 나는 것만 같은 황홀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판다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한 아이가 판다에게 다가가 검은 다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기후변화로 북극이 따뜻해진 탓일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판다를 쓰다듬은 아이의 두 손에 검은흙이 잔뜩 묻어 나왔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 변하기 시작합니다. 무언가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한 눈보라는 주위의 인간들을 쳐다보았습니다. 화가 난 사람, 실망한 사람, 차가운 시선, 경멸, 분노.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횃불과 몽둥이, 삽자루를 든 채 성난 얼굴로 눈보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눈보라는 무섭게 변한 인간들로부터 도망쳤습니다. 별빛도 숨 죽은 어두운 밤이었지만 얼굴과 몸에 바른 흙이 벗겨진 하얀 북극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눈보라를 겨누고 있던 사냥꾼의 총이 불을 뿜습니다. 발사된 총알은 아슬아슬하게 눈보라의 귀를 스칩니다. 겁에 질린 눈보라는 더 빨리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시 쏘라며 사냥꾼을 재촉합니다. 사냥꾼이 두 번째 방아쇠를 당기려 조준을 합니다. 눈보라가 표적에 들어오자 다시 방아쇠를 당기지만 이번에도 빗나갔습니다. 허구한 날 술만 마신 사냥꾼의 손이 떨린 탓이었고, 하얀 눈이 눈보라를 가려준 탓이었습니다. 사냥꾼은 더 이상 조준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는 북극곰이 마을로 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까만 하늘에서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밤에 하얀 북극곰 눈보라는 빙하 계곡 깊은 곳으로 쉬지 않고 달립니다. 거센 북극의 한파가 불어오고 눈발은 점점 굵고 거대해집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불던 날 눈보라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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