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잊었던 용기
작가 : 휘리
출판사 : 창비
표지를 넘기면 함박눈이 쏟아지는 도로와 공원이 보입니다. 분명 겨울일 텐데 그림 속 풍경은 따스합니다. 자전거 전용 도로표지판 주위로 사람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눈이 많이 와서인지 지나다니는 자동차들도 적습니다.
미끄럼틀과 철봉, 그네, 스프링 의자가 있는 공원에 눈이 소복이 내렸습니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도 하얀 눈옷을 입었습니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없는 공원 한구석에 겨울방학이 지나고 친구와 서먹해졌다는 아이의 독백이 흐릅니다.
이 책은 작가가 문학 웹진에 실은 에세이를 그림책으로 구성하여 펴낸 것이라고 합니다. 소개된 작가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작가의 많은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만개하여 떨어진 벚꽃들과 함께 편지 봉투와 펜, 한 글자도 적지 못한 편지지, 편지를 실어 보낼 종이비행기가 접혀 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연두와 초록의 새잎이 돋아나고 노란 개나리가 교정을 봄으로 물들입니다. 삼삼오오 학생들이 등교하고 저 멀리에 작년에 같은 반이었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봄 내음을 가득 품은 봄바람이 가득하던 교정에서 친구와 마주쳤지만 그만 눈을 피하고 말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어색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와 인사를 나누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 한 번의 지나침으로 인해 인사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운동장에는 봄의 푸르름이 가득합니다. 하교하는 학생도 있고 공놀이를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아이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지만 친했던 친구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교실 창밖으로 하얗고 노란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보입니다. 가지런히 접어놓은 커튼 사이로 봄볕이 교실에 평화로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아이 혼자 남아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어.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봄비가 내립니다. 촉촉한 축복에 대지는 생명력을 얻습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여기저기서 앞다투어 피어납니다. 그 사이를 노란 우산을 쓴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걸어갑니다. 마치 아이의 마음은 봄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싶은데 서먹해진 친구와의 관계로 우울한 모습입니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집입니다. 거실과 아이 방 창밖에는 푸른 식물이 자라고 집 안에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화분에서 식물이 풍성하게 자랍니다. 봄 햇살이 좋은지 강아지도 햇살을 즐깁니다. 오래된 벽시계가 네 시 이십 분을 가리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정갈하게 정돈된 자기 방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습니다.
아이가 사는 동네도 길가에 푸른 잎과 하얀 꽃이 화사하게 피었습니다. 가로수와 담장이 있는 집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와 풀들에서 진한 봄의 향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그 한편에 초록 우체통이 있습니다. 강아지를 안고 나온 아이는 우체통 안으로 편지를 집어넣습니다. 서먹해진 친구에게 다시 친하게 지내자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아이는 강변 공원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나왔습니다. 강변을 따라 자라고 있는 커다란 수양버들도 푸른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강기슭에선 백로 한 마리가 흘러가는 강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공원 벤치에서는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공원 잔디밭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공원 그네에 앉아 있습니다. 저녁 시간인 걸로 보아 학원을 갔다 오는 길인가 봅니다. 봄바람에 꽃잎이 흩날립니다. 골목에는 저녁 마실을 나온 주민이 보이고 집 담벼락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양이 옆 화분에는 앙상한 가지에서 초록 잎보다 노란 꽃이 먼저 피었습니다. 아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름이 벌써 오려는지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청년이 지나갑니다. 차도 사람도 많지 않은 한적한 동네입니다. 길 건너편에서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갑니다. 반바지를 입은 아이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봅니다.
이곳저곳 푸르름이 완연한 어느 날, 아이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보낸 사람은 아이가 그토록 기다리던 친구였습니다. 아이의 편지에 친구가 답장을 보낸 것입니다. 아이가 사는 아파트를 둘러싼 온갖 식물들이 온화한 햇살을 받아 건강한 생명력을 발산하며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아이는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무 밑 공원 계단에 앉아 천천히 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친구도 아이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친구도 아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친구의 엄마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 아이를 용감한 아이라고 칭찬했다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아이의 머릿속에 ‘용감한 아이’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아이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고 친구가 보낸 편지를 가슴에 소중히 품습니다.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아이의 마음도 향기롭습니다.
드디어 아이와 친구가 마주쳤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에 품고 있던 마음을 드러낼 기회입니다. 용기를 낼 시간입니다.
아이와 친구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양팔을 벌리고 서로에게 달려갔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친구도 용기를 낸 것입니다. 아이와 친구의 재회를 축복이라도 하는 듯이 이 광경을 지켜보던 꽃들도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을 날려 보냅니다.
짙게 녹음이 진 공원에서 두 아이가 그네를 탑니다. 아이는 하늘로 높게 날아오르고 친구는 그 모습을 보고 웃습니다. 아이와 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강변 공원을 내달립니다. 아이가 강아지와 산책 왔던 때보다 초록 잎이 더 짙어지고 숲의 생태계가 더욱 다양하고 풍성해졌습니다.
휘어질지언정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는 억새가 가을바람에 몸을 누입니다. 아이와 친구는 오늘도 둘이 같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