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승주의 숨결을 느끼며 수진은 눈을 떴다. 승주가 깨진 않을까, 자신의 아랫배에 포개진 단단한 팔을 조심스레 풀었다. 거실은 서늘했다. 그래도 야외 웨딩촬영이 있을 일주일 후부턴 날이 풀린다고 했다. 커피를 내리며 수진은 지난 밤 확인하지 않은 메일과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이번 달 오피니언 리뷰 영화는 ‘캐치볼’로 합시다.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 남겨요.
매달 칼럼을 기고하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캐치볼’은 일주일 전 개봉하여 호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었다. 수진은 뜯어보지 않은 시사회 초대권을 생각했다. 평론가들에게 형식상 나눠주는 초대권이었다. 볼 생각은 없었다. ‘캐치볼’에 관한 리뷰도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다. 거절의 문자를 보낼까 했지만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관두었다.
평소 아보카도 토스트나 오트밀로 아침을 해결하는 승주였지만 오늘은 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수진은 앞치마를 둘렀다. 쌀을 씻어 안치고 다시마와 멸치를 넣고 육수를 끓였다. 어젯밤, 뉴욕에서 보름 가까운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승주를 데리러 갔다. 공항 톨게이트를 벗어나면서 포개진 손등에 입을 맞춘 승주는 자신의 집으로 가자했다. “오늘은 같이 자자. 내일 출근 안 해도 되거든.” 만 서른하나. 나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호들갑 떨 시기는 지났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던 건 오늘이 수요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프리랜서로 전업한 건 3년쯤 전부터였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대학 두어 군데에서 강의도 했지만 수입은 승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한강 조망권의 한남동의 집과 번듯한 직장, 명망 있는 부모를 둔 승주에 비해 프리랜서인 자신의 처지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진 모르겠다. 평일의 늦은 밤,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승주의 순진무구한 얼굴에 수진은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수요일의 이른 아침, 마땅히 가야할 곳이 없기도 했다.
지수에게서 문자가 온 건 두부의 포장을 막 뜯었을 때였다.
-태형이가 죽었대. 전화 가능하니?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109호. 주소 남길게.
칼을 쥔 손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썰다 만 두부를 도마에 올려둔 채 수진은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거실을 서성였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였다. 일곱 시 십오 분. 한남대교를 통과하는 차량의 행렬을 수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와 같은 풍경일 터였다. 수진이 내쉬는 숨결로 발코니의 유리창에 김이 꼈다. 창 너머의 세상을 거대한 안개가 집어삼킨 듯 보였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번뜩 정신을 차렸을 땐 육수가 끓어 넘쳐 가스레인지의 불에 닿는 소리가 났다. 마른 침을 삼킨 수진은 다시 부엌으로 갔다. 불을 조절하고 묵묵히 도마질을 하고 된장을 한 숟갈 떠서 멸치육수에 풀었다. 지수에게는 전화하지 않았다. 늦게라도 오늘은 장례식장에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좋은 냄새 난다. 보름 동안 느끼한 것만 먹었더니 부대끼더라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승주는 머그잔에 커피를 따랐다.
“좀 더 자지.”
한 손에 머그잔을 쥔 채 승주는 뒤에서 수진을 안았다.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하고서 수진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묻은 승주는 “오늘 뭐할까?” 물었다. 수진은 가볍게 승주를 밀어내고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춘천 간다고 했잖아. 아버지 병원.”
승주를 바라보지 않은 채 수진은 반투명한 비닐에 담긴 청양고추를 꺼내 썰었다.
“미안. 그럼 같이 가자, 가서 아버님 뵙고 과일도 좀 사다드리고.”
“다음에. 오늘은 처리할게 많아. 앉아, 밥 먹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려하는 것쯤은 승주도 눈치 챘을 것이다. 수진이 밑반찬을 접시에 옮겨 담는 동안, 승주는 두 사람 분의 밥을 그릇에 담았다. 승주는 시시콜콜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뉴스 애플리케이션을 틀어놓은 채 두 사람은 숟가락을 들었다. 수진의 숟가락이 우뚝 멈춘 것은 순간이었다. 태형의 사고 소식이 속보로 이어지고 있었다. 톱스타의 사망 소식에 승주 역시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사람 죽고 사는 거 한순간이야.”
“그러게.”
동요하지 않으려 젓가락질을 이어갔으나, 밥 외에 다른 반찬엔 손이 가질 않았다.
“주말에 영화 보러 가자. 캐치볼 괜찮지?”
“지난주에 본 거라…… 칼럼 써야 해서.”
뉴스에서는 태형이 주연을 맡은 캐치볼에 대한 소식으로 넘어갔다. 유작인 셈이었다. 개봉한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주연배우가 사망한 일은 화제가 될 만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수진은 모래알처럼 느껴지는 밥알을 간신히 삼켜냈다.
“참, 차 조심해. 안전벨트 꼭 하고.”
지나가듯 무심한 승주의 말이 수진의 가슴에 턱,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