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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명체 다큐를 보라

- 2020년 7월 22일 우크라이나 대통령 페이스북 게재글 -

by 민하


“엄마, 노랑이 어디 있어?”

엄마는 내 말을 듣고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저녁 준비만 했다. 이상했다. 학교 갔다 오면 항상 마중 나와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던 노랑이였다. 나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노랑이는 육 개월 전 태어난 강아지였다. 노랑이의 엄마가 5형제를 낳았지만 추운 겨울이었던 탓에 세 마리가 동사하고 두 마리만 살아남았다. 일주일 뒤 아직 어렸던 새끼들을 두고 어미는 실종되었다. 엄마는 누군가가 식용으로 잡아갔을 거라고 했다. 좀 더 예뻤던 노랑이는 우리가 키웠고 못생겨서 안경이라고 이름 붙인 강아지는 이모네에서 키웠었다.

그날 밤 저녁상엔 정체모를 메뉴가 올라왔다. 커다란 냄비 안에 처음 보는 고기가 들어 있었다. 엄마는 빨리 먹으라고 했지만 무언가 냄새도 이상하고 느낌도 이상했다. 아빠와 엄마는 먹었지만 고기를 좋아하던 언니는 숟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제야 나와 동생들은 우리 집 노랑이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우리 집 건너편 개천으로 많은 개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었다. 아주 어린 개부터 큰 개까지 어떤 통일성도 없었다. 개천에서는 다리에 목줄을 매달아 놓고 각목으로 패기도 했다. 여름 내내 강아지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2020년 7월 22일, 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페이스 북에 이색적인 글이 올라왔다.

“모두 지구 생명체(earthlings.2005)라는 다큐를 보라”

이 글은 대통령의 자의에 의한 글이 아니라 인질에 대한 협상으로 게시되었다. 「막심 크리보슈」라는 40대 남성인 우크라이나인은 버스에 폭탄을 설치하고 13명의 인질을 잡았다. 그는 버스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대통령과의 직통전화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대통령과의 전화를 통해 막심은 페이스북에 한 줄의 글을 게재할 것을 요구했다. 막심의 요구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12시간 만에 들어주자 약속대로 즉시 인질을 풀어주고 투항했다.

기사에서는 인질범에게 정신 병력과 전과가 있다고 끝맺으며 기이한 요구를 하는 정신병자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돈과 헬리콥터를 요구했다면 정상적인 인질범이었을까? 하지만 자기의 소박한? 요구조건이 실현되자마자 순순히 투항하고만 이 범죄자에게 나는 어디서도 정신병자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아마 재판에서도 그는 정신병자라고 감형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전에 복역했던 감옥에서 ‘범죄자의 철학’이라는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국가권력의 문제점을 쓴 책이라고 기사에는 적혀있다.


나는 이 사건이 터진 곳에서 먼, 지구 동쪽 끝에 있었지만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지시한 대로 인터넷에서 ‘지구 생명체’를 찾아냈다. 이 영화는 2019년 ‘조커’로 남우주연상을 탄 호아킨 피닉스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만들어진지 이미 15년이 되었다는데도 나는 이런 영화가 있는 것을 몰랐다. 장르에는 다큐멘터리, 공포라고 적혀있다. ‘공포’ 영화다.

영화는 유튜브로 바로 연결되어 볼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심호흡을 한 후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반려동물에 대한 진실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길에는 유기견이 넘치지만 사람들이 선호하는 강아지를 얻기 위해, 선호하는 품종에 대한 수요는 자연적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강아지 공장이 성업한다. 품종 있는, 소위 잘 팔리는 강아지들은 임신 기계가 되어 계속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한다. 태어나서 몇 달 만에 임신하고 죽을 때까지 강아지를 낳는 기계가 되어 작은 케이지 안에서 삶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가 데려온 그 귀여운 강아지의 엄마는 지금도 그렇게 또 임신하고 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키우던 개들이 버려진다. 동물보호소에서는 멀쩡한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안락사당하고 있다. 유기동물보호소에 절반이 그 주인이 직접 데리고 온 동물들이라는 통계도 있다. 생명이 생명이 아니라 물건, 상품이라면 이렇게 쉽게 생산되고 버려질 수 있다.

소, 돼지, 닭 등 식용 동물들이 처한 현실은 더욱더 끔찍하다. 고기의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초식동물인 소에게 풀이 아닌 곡식과 우유를 주고 근육 발달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도록 한다. 원래 소의 수명은 40년가량이지만 보통 4살 정도에 도축된다.

또한 우유 생산을 하기 위한 젖소들은 대량 생산을 위해 몇 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우유를 기계로 빼내어 생산하게 된다. 곧 그들은 제대로 설 수도 없이 약해지게 되고 더 이상 우유를 생산할 수 없게 되면 패스트푸드의 재료가 되어 생을 마감한다. 우리가 먹는 햄버거 패티는 최대한 저가의 비용으로 생산하기 위해 거의 이런 젖소고기를 사용한다.

우리들의 신발이나 소파를 만드는 가죽, 이것 또한 살아있는 소의 피부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었나. 피부가 상품성을 뛴 가죽이 되기 위해서는 유독성 있는 약품에 담가 화학처리를 하게 된다. 소들은 고기뿐만 아니라 가죽을 위해서도 희생되고 있다. 인조가죽이 충분히 대체 가능한대도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뺏고 있다.

모피를 만드는 공장에서 재료가 되는 동물들은 길러진 동물들이 아니라 야생에서 잡혀온 야생동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들도 극심한 공포와 학대 속에서 죽어간다.


그렇다면 해산물은 괜찮을까? 정유회사, 참치 업 등 거대기업들은 그동안 바다에 모든 쓰레기들을 버렸다. 최근에야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불법이 되었지만(여전히 몰래 버리고 있긴 하지만) 이미 바다는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어있다.

여기서 잡은 물고기들이 정상적일 리 없다. 게다가 저인망식 그물로 바다의 바닥에 있는 것까지 싹쓰리 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 인간들은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고 그리고 버리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나는 재생을 멈추고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을 진정했다. 다음 장면을 마주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 그나마도 어떤 장면은 화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서 내레이션만을 들었다. 도저히 화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다음번엔 얼마나 더 잔인한 장면이 나올 것인가.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호러무비」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작업을 하고 있는,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상적인 한 장면일 뿐이다.

슬프게도, 정말 단 한 장면도 연출한 것이 아니고, 단 한 장면도 과장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최소한의 장면만을 가져온 것이다.


“엄마. 내 친구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살 거래. 그 앤 아무 걱정도 없어.”

대학생인 별이의 단짝 친구인 연이는 별이가 분노할만할 이야기를 해도 전혀 관심 없다고 했다. 별이는 대학생이 된 이후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고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는 일이 많다. 연이는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는 자기에게 하지 말라며 자기는 그냥 편하게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살 거라고 한다고 했다.

나도 정말로 연이가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세상이 상품을 팔기 위해 진실을 가린 세상이라면, 이 세상이 약한 자보다 강한 자에게 훨씬 더 너그러운 세상이라면, 이 세상이 정의보다는 돈에 의해 결정적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라면 연이의 말은 꿈이 된다.

거대기업들은 아름다운 광고로 위장하고 그들의 고기가 평화로운 상태에서 온 것처럼 포장지에 농장을 그려놓았다. 하지만 현실에는 농장은 없고 공장뿐이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빨리 고기를 생산하는가가 부의 척도가 된 세상에서 모든 것은 비용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안락사는 오히려 행복한 마지막이다. 안락사에 대한 주사의 비용은 그냥 죽이는 것보다 비싸다. 식용동물은 물론 유기동물조차 비용 때문에 안락사되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유발하는 방법으로 죽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마취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조차 없다.

식용 동물들은 태어나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어떤 친절함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는 그들에게 우리는 최소한의 예의는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다.

강아지 공장, 식용동물을 다루는 농장, 도축장, 모피, 가죽, 투우, 서커스, 동물원, 우리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 아니 최소한으로도 알지 못한다. 누구도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누구도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외면한 사이 그들의 고통은 배가 되고 점점 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들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단지 모른다고 해서 그 고기를 안 먹는 것은 아니다. 고통스럽게 죽어갔던 그 소와 돼지는 어제 우리 식탁에 있던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보는 인터넷에도 거의 포르노 같은 성인광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떠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표현의 자유가 없다.

이 지구 생명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라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막심 크리보슈, 감옥에 갈 것을 알면서도 13명의 버스인질을 잡았던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나는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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