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떠날지 알 수 없다면 2편-
“나, 이 길 나 매일 다녔어.”
내가 운전하는 차 옆 좌석에 앉아 창문으로 조용히 밖을 바라보던 석이가 말했다.
“우리 회사 버스 노선 코스야.”
“아! 그래? 여기였어?”
차창 밖으로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건물이 보였다. 그렇다면 OO 운수 버스기사 생활 2년간 석이는 내 사무실 앞을 셀 수도 없이 지나다녔을 것이다. 나는 이쪽 지역 사무실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넘었다. 가끔 OO 운수가 지나다니는 것을 본 적도 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석이가 운행하는 버스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석이만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석이도 네 명의 누나 밑의 독자로서 외로웠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뇌혈관 전문병원에 입원한 지 3일 만에 종합병원 입원 수속을 하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휴가를 내고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석이의 얼굴은 아주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나를 보더니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한다. 나도 애써 표정을 감추고 퇴원수속을 했다.
전담간호사는 몰래 담배를 피우는 것 같다고 내게 말해줬다. 사물함의 구석에 디스 담배가 놓여있다. 석이는 어쩌면 다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도 심근경색 수술 이후 술과 담배를 강제로 끊었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무언가를 끊게 되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담배를 들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아빠는 일용직 건설노동자였다. 배운 것도, 기술도 없이 하루하루 노동자로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힘들었다. 부양가족이 여섯 명이었다. 석이가 세 살이 되자 엄마는 석이를 새마을 유아원에 맡기고 청소 일을 하러 다녔다.
부모님은 항상 해도 안 뜬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을 나갔다. 그 누구보다도 성실했지만 우리 집은 해를 더해갈수록 산동네에서 더 산동네로 이사를 갔다. 커갈수록 집으로 갈 때 올라가야 할 계단이 점점 많아졌다.
언니는 중학교를 보내주지 않자 집을 떠났다. 언니의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이 언니를 데려갔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언니를 자기 아이의 보모로 데려간 것이었다. 14살인 언니는 선생님이 퇴근할 때까지 아기를 돌봐야 했다. 야간중학교에 거의 출석만큼의 지각을 했다. 엄마는 몇 달 만에 언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없이 엄마는 중학교를 보내주었다. 그렇지만 공부를 잘했음에도 고등학교는 야간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미 첫 번째 경험이 있던 탓에 둘째인 나는 중학교는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었다. 이제 고등학교가 문제였다. 부모님은 상고를 가라고 했다. 내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었다. 나는 꼭 대학 갈 거라고 인문계를 보내달라고 했다.
“네가 어떻게 대학 간다는 거냐? 돈이 없는데.”
호통 치는 아빠에게 나는 장학금 받고 다닐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인문계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셋째 진희와 넷째 은희는 엄마가 가라는 대로 상고로 진학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석이는 다르게 대했다. 남자아이였다.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와는 달리 석이는 어릴 때부터 그 말을 듣고 자랐다.
석이가 처음 동네 슈퍼 앞 오락기 앞에서 잡혀온 것은 네 살 때였다. 바로 위 누나인 넷째 은희도 5살 위여서 학교 갔고 엄마도 일을 다녔다. 석이는 걷잡을 수 없이 오락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학교 준비물 살 돈도 없었지만 특별대우였던 남자인 석이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오락실을 갔다.
시대를 따라 오락실에서 피시방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도 슈퍼마리오, 로드 러너, 스타 크래프트에서 서든 어택, 블리자드에 이르기까지 최첨단 게임을 석이는 섭렵했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도 석이에게는 항상 플레이스테이션이 있었다. 밤늦게까지 게임을 했다.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급기야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검정고시로 과정을 졸업하고 전문대에 들어갔다. 군대에 갔다 온 후 이마저도 중퇴했다.
그 후 20대를 거의 집에서 게임만 하면서 지냈다. 이미 칠십에 가까운 부모님이 석이를 부양했다. 그때는 엄마는 공공근로를 하셨고 아빠는 주민등록이 10살이나 어리게 되어있어 고용직 공무원(*공원 관리 등 잡일을 하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고는 치지 않았다. 석이는 천성이 착해서 괴롭힘을 당할지언정 누굴 괴롭히지는 못했다.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석이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사업도 해보고 취직도 해보았다. 그러나 사회의 벽은 높았다.
“엄마. 200만 원만 주세요. 1종 대형 면허 따야겠어요.”
석이는 운전을 좋아했다. 5년 전 마을버스기사로 취직했다. 3년을 마을버스에서 경력을 쌓은 후 서울지역의 버스기사로 일한 지 2년이 넘었다. 나도 석이가 이렇게 까지 성실하게 일을 할지는 몰랐다. 버스운전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석이가 대견스러웠다. 엄마는 내가 가끔 들리거나 반찬 갖다 주러 갈 때마다 자랑스럽게 말했다.
“새벽같이 일하러 간다. 일어나 보면 벌써 없어.”
오후 1시, 나와 석이는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711호는 6인실이었는데 중간 쪽 침대가 석이의 자리였다. 간호사가 호출했다. 의사 면담을 먼저 해야 했다.
“석아, 의사 면담에 오라는데 가자.”
석이는 가지 않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석이의 얼굴은 어두웠다. 나라도 하늘이 무너졌을 것이다. 어차피 수술을 해서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것은 알 것이다. 나는 혼자서 영상자료를 가지고 면담을 하러 갔다.
종합병원 담당의사는 정확히 뇌종양이라고 했다. 물론 수술을 하겠지만 이미 영상자료만으로도 확실하다고 한다. 조직검사를 해보아야 양성인지, 악성인지, 종류가 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점점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이 정체모를 무언가를 어찌할 수가 없다. 공포감이 나를 휩쌌다.
조직검사는 1주일 후로 잡혔다. 지금 몸 상태에 따른 검사를 다시 하고 수술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루, 하루가 급한데 병원은 느리기만 했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오진일 수도 있다. 만일 진짜 뇌종양이라고 하더라도 젊으니까 초기일 것이다. 언니와 동생들도 다들 그렇게 믿고 있는 듯, 우리는 희망을 품고 감정을 자제했다.
나는 뇌혈관 전문병원에서 받아온 병명과 코드가 적힌 메모지를 꺼냈다. 거기에는 직원이 손 글씨로 써준 「뇌의 악성 신생물 – C71.9」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신생물?’
나는 메모지에 적힌 코드와 글씨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감이 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SF소설에서 만나는 외계 생물체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이상한 이름을 나는 수납계에 가서 말해주었다. 특례가 적용이 되면 급여항목에 대해서는 95퍼센트의 할인이 적용될 터였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신생물은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한 것으로 종양(암)을 뜻하는 말이었다.
“언니. 이게 무슨 일이야.”
로비에 진희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서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았다. 셋째인 진희가 석이의 간호를 위해 짐을 싸가지고 왔다. 진희가 오지 않았다면 휴직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직장인이 아니라 해도 동생의 간호를 위해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희에게 고마웠다. 나는 진희에게 내 카드를 주고 점심과 저녁을 사 먹고 커피도 사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시간에 교대해주고 주말에도 교대하기로 했다.
대학병원은 바로 우리 사무실 앞에 있다. 나는 일부러 이 병원으로 입원을 시켰다. 점심시간과 퇴근 후에 바로 갈 수 있을 터였다. 석이도 매일 버스 운전하며 수없이 지나쳤을 그 병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