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18개월의 기록을 "고시 전", "고시 중" 그리고 "고시 후"로 나눠 구성하였다.
고시 전
2022년 2학기, 대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학기.
당시 나는 이미 전공학점을 다 채웠기 때문에, 여유롭게 듣고 싶은 교양 수업만 들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취업준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일까, 결국 취업을 희망하는 회계 쪽 전공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경영학과인 내가 들을 수 있는 회계과목을 전부 수강한 상태여서 나는 결국 타 전공인 세무학과의 "중급회계"와 "원가관리회계"수업을 신청해서 듣게 됐다.
설레는 타 전공 수업 첫날.
절도 있는 보폭과 실수와 거리가 멀 거 같은 이미지의 여자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당당하게 걸어 들어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어주셨고, 바로 출석표를 보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30명이 넘는 강의실에서 내 이름을 콕 집어 부르며 "학생 경영학과 학생이네요?", "회계학개론은 들었어요?" 등등.. 감사하지만 동시에 감사하지 않은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다.
교수님은 학생에 대한 관심만큼 수업에도 열정적이셨다. 그리고, 그 열정만큼 강의 전달력도 굉장히 훌륭하셨다. 주먹구구식으로 암기한 회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변동원가의 유래"였다. 2년 전에 들었던 이 설명이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뚜렷이 기억날까 싶다.
계속 수업을 듣다 보니 바로 내 앞자리에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있었다. 그 친구는 수업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났으며, 심지어 쉬는 시간이 되어도 뭔지 모를 인강을 들으며 공부했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이어폰 빼는 타이밍에 맞춰 말을 걸어봤다.
"오 안녕! 너 진짜 열심히 공부하더라..!"
"무슨 공부해?"
다행히 그 친구는 친절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동갑이란 것을 알게 됐다. 말을 편하게 하다 보니 금세 번호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더 대화를 나눈 결과, 그 친구는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시작한 지 약 3개월 정도 됐다고 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세무사란 전문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마 정말 정말.. 정말 많이 열심히 해야 할 거야"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기 전 교수님께 상담을 신청했고, 당시 교수님이 내게 해주신 말이다. 당시 나는 세무사란 전문직에 매료된 상태였다. 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험난할 뿐 그것만 잘 헤쳐나가면, 내가 가진 학벌의 벽을 부술 수 있으며 높은 임금과 워라밸이 마치 보장이라도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교수님의 걱정 어린 조언에도 나는 무조건 "할 수 있다"를 외치며 고시를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재경관리사 자격증 취득, 회계 동아리 활동, 회계학 튜터링 활동 그리고 수강 중이던 중급회계와 원가관리회계 중간고사에서 상위권을 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자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작아도 너무 작은 우물에서 자만하는 한 마리의 개구리였단 것을 그 당시의 나는 왜 알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나는 번호를 주고받은 동갑내기 친구에게 1타 강사와 시험에 대한 정보를 들었고, 바로 인강으로 세법부터 수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무식하면 그게 바로 용기가 되는 것이다.
고시 과정
그렇게 나의 세무사 시험공부가 시작됐다.
22년 12월
당시 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세법부터 수강하였고, 부가세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법인세를 배울 땐 정말 포기하고 싶었다. 강의량과 강의시간이 상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강의를 듣고 다음 날이 되면 머리에 남는 게 10%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승부욕이란 게 생겼을 텐데 당시엔 절망감이 99% 였던 거 같다. 하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기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공부했던 거 같다. 회독을 하며 나아지겠다는 믿음 하나로.
23년 2월
부가세와 법인세를 수강한 다음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본격적인 전업 수험생이 되었다. 자유시간이 늘어나면 공부시간도 같이 길어질 줄 알았지만, 이게 별개의 문제란 걸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험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게 오전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건데, 당시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계속 핸드폰만 봤던 게 기억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 공부량을 채우지도 못했는데 계속 누워있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했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결국 우울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우울감은 내게 큰 스트레스를 선물해 줬다.
23년 3월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이 하나 있다. 몇 회독을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고 다시 처음 파트를 폈을 때 머리에 남는 게 거의 없어서 책상을 정신이 나간 듯 내려쳤었다. 화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심적으로 너무 조급함을 느꼈다. 몇 번 내려치고 나니까, 내 심신이 많이 나빠졌고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3년 4월
내가 내린 답은 운동이었다. 원래도 헬스를 했지만 유산소 운동이 스트레스를 줄여준다고 하여 러닝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고 덕분에 건강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닝을 하면 배가 고파서 배달음식을 자주 먹었고 그러다 보니 살이 빠른 속도로 찌기 시작했다. 장시간 앉아있는 고시생의 경우 허리나 목 둘 중 하나가 항상 문제가 생기는데, 나의 경우 허리였다. 살이 쪄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 번 앉으면 잘 안 일어나는 공부 스타일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시기에 허리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꽃가루 알레르기까지 나를 괴롭혔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정반대가 내게 적용됐던 시점이다. 즉, 정신 파괴는 건강하지 육체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다행히 책상을 내려치는 일은 없었지만, 거의 그에 준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여자친구에게도 많이 예민하게 대했던 거 같아 그 부분은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23년 5월
그러다 보니 찾아온 1차 시험 당일. 숨을 편히 들아마시기 어려울 정도로 떨렸다. 수능, 토익, 학교 시험 등 그동안 다양한 시험을 치르면서 시험장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봤는데, 고시생만큼 표정이 어둡고 살이 찐 사람들은 없었다.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살이 통통하게 올라왔고, 얼굴에는 그늘이 수 겹씩 겹친 거 같았다.
당황할 여유도 없이 시험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시험장을 나가며 든 감정을 절망감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험이 끝난 후 약 4시간 동안 커뮤니티에 들어가 "저 망했어요...."라는 글들을 보며 심신을 안정시켰던 것 같다. 금방 올라온 정오표로 채점한 결과, 회계학 과락이었고 믿었던 회계에 큰 배신감을 느끼며 슬퍼했던 거 같다.
23년 6월
한국은행 금리가 올랐을 때.
당시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월세를 최소로 낮추기 위해 보증금을 올렸고, 다행히 LH 청년매입임대 제도를 통해 보증금의 90%를 은행에서 쉽게 대출할 수 있었다. 당연히 금리가 낮을 때에는 이 전략이 잘 먹혔지만, 내 대출 금리는 점점 고공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현실적으로 봤을 때, 아르바이트를 늘려가며 고시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나는 본가에 들어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23년 7월
본가에 들어온 나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남은 고시생활을 보내기로 다짐하였고, 도서관에 사전 답사를 갔던 그날 내가 사용하는 계산기와 같은 디자인의 계산기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 전부 CPA나 CTA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먹구름이 300개 정도 농축된 듯했지만, 나는 속으로 동료를 얻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본가에 들어오니 감사하게도 청소나 요리 등 부모님이 해주시는 게 많아서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 외에도 엄청난 이점이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현재까지도 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데, 아버지한테 한심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기 위해 알람이 울리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뜻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다고 휴대폰만 주야장천 보는 나의 악습관이 강제 삭제됨을 의미했다.
중간에 세법학을 수강해 버려서 시간을 많이 날려버렸지만, 그래도 24년 3월까지 내 공부루틴은 큰 무리 없이 돌아갔다. 주에 순 공부시간은 4-50시간을 찍었고, 운동도 꾸준히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 관리도 잘 이뤄졌다.
24년 3~4월
그렇게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지만 세상은 그리 순탄치 않더라. 하루 루틴이 점점 안정화되어 갔을 무렵, 갑자기 허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세를 어떻게 고쳐도, 허리에 좋은 스트레칭을 아무리 해도 허리 상태는 점진적으로 악화됐다. 버티다 버티다, 봄이 찾아왔고 꽃가루 알레르기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나를 반겨주었다. 1차 시험을 볼 때까지만 참자고 생각했지만, 단 10분도 앉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시험 2주일 전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고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시험이다. 여기서 물이 시험공부라고 가정했을 때, 누구나 물을 뜰 수는 있다. 즉, 공부하는 주체가 사람이고 세법과 회계 원리부터 차근차근 공부했다면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 없는 내용 들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여기서 독은 사람의 기억력이다. 우리가 머리에 넣은 지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신경쓰지 말고 바로바로 리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고시는 어렵다기보다 막강한 정신력으로 밑 빠진 독에 물을 쉴 새 없이 붓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의 핵심은 시험 한 달 전, 독에 물 붓는 도구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처음엔 손으로 물을 퍼서 부었다면 시험 한 달 전에는 최소 중형 바가지는 써야 한다. 이때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마구 붓는 거다. 다소 잔인할 수 있지만, 5년 또는 10년을 열심히 해도 이 한 달 동안 마구 붓지 못하면 떨어지는 게 고시다.
나는 아쉽게도 마지막 순간에 바가지를 빌려오지도, 만들어오지도 못했다. 오히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울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버렸다. 책상에 앉아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누워서 공부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한 번 망가진 멘탈은 시간이 지나도 복구되지 않았다.
고시 후
그렇게 2번째 고시도 끝났다.
시험 점수는 첫 번째(23년) 세무사 시험보다 낮았다.
당시 인생에서 가장 큰 절망감을 느꼈다. 180cm의 27살 청년이 공원에서 혼자 꺽꺽 울어보기도 했으며 한동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별로 친하지 않지만 사회에서 한 자리씩 잡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단체 모임은 매우 기피했다. 누구보다 내가 노력한 걸 알았던 여자친구도 내 앞에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고, 그 눈물을 봤을 때 마음이 아려왔다.
한동안은 방에 누워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웹툰과 유튜브를 몰아봤지만, 하나도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수험기간이 끝나면 하려고 써놨던 버킷리스트도 다시 펼쳐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게 조언을 해주셨던 모든 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조차 없었다.
세무직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해볼까 싶어 한국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시험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쳤기에 시작 조차 하지 않았다. 1년에 1번 있는 시험을 다시 도전하기에는 너무나도 리스크가 크다고 느껴졌다. 밑을 모르고 추락했던 자신감 때문에 차선책이라 생각한 취업 준비를 결국 선택했다.
취준을 마음먹고 난 뒤, 나는 한 카페의 회계팀 취업 멘토가 그렇게도 필요 없다던 영어성적을 취득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변변찮은 영어성적 하나 없었기 때문에, 취업에 악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본다면 취업 멘토의 말이 맞았다. 굳이 대기업을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영어 성적은 필요가 없었다. 그도 그럴만한 게, 회계팀은 영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4년 10월이 되어서야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대기업 경영지원부서는 정말 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 나 힘든 거 좋아하는데 도전해 볼까!?"이런 부류의 힘든 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특히 나 같이 학벌이 좋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여러 회계팀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취업 컨설팅도 받은 결과, 대기업 회계팀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대기업 회계팀에 들어가게 되면 단일의 계정과목을 맡게 되는데 진급이 되어도 쉽사리 업무 폭이 넓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직도 못하는 완전한 대기업의 소모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중견-중소기업을 지원하면 되지 않냐고? 그 마저 어렵다. 취업 시장이 매우 얼어붙은 현재, 중견기업 대다수는 신입을 뽑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규모가 너무 작은 연매출 500억 이하의 중소기업은 싫다. 취업난이 맞냐며 인력이 부족하다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에게는 해줄 말이 많지만 여기에 쓴다면 문제가 많기 때문에 넘어가야겠다. 아니, 커피와 녹차 그리고 사대보험이 복지라고 당당하게 써붙인 사장님들의 회사에 가고 싶은 대졸자가 있을까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시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이 두 가지 정도 있는 거 같다. 첫 번째는 엉덩이 힘이다. 앉아있는다고 취업이 한순간에 되고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는 건 아니지만, 취업도 시험도 목표하는 걸 이루기 위해선 일단 앉아있어야 한다. 무언가 준비할 때 필요한 선행조건을 지금의 나는 쉽다고 느낀다는 게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관련 지식이다. 당연히 회계와 세법에 대한 지식이 많이 확장됐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 면접에서 직무 관련 질문에 대비하기 위해 회계원리를 유튜브에서 보고 있다. 지식 대부분이 머릿속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대부분 머릿속에 들어있는 내용이었다. 마치 죽었다고 생각한 딱딱한 물고기 시체에 물을 부어주니 금세 뻐끔뻐끔 살아나는 것처럼 굉장히 신기했다.
나는 너무나도 신중한 성격에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음식점에 가더라도 같은 것만 먹고 크든 작든 실패하는 걸 굉장히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런 내게 세무사 시험이라는 고시는 나라는 사람을 조금은 도전적이게 만들어 준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잃은 것도 분명 많겠지만 말이다.
100%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나는 내가 고시 공부를 했다는 걸 후회하지는 않을 거 같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나이 먹고 준비하지 않음에 감사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켜야 할 게 많아지기 때문에 쉽게 리스크 큰 도전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올해 5월에는 한 세시생(세무사 고시생의 줄임말)이 솔직한 심정을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분은 본인이 무조건 세무사 시험에 붙을 줄 알았는지, 잘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고시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23년, 24년 1차 불합격이었다. 그분의 글을 보고 잃을 게 굉장히 적은 20대 때 고시를 준비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10년 뒤 내 삶이 그려지지 않지만, 취업에 성공해서 내가 받은 월급으로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고작 하루로 내가 바뀌진 않겠지만,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기간이 된다면 조금 바뀔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