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평생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 아이는 과일 중에 멜론을 참 좋아한다. 올 여름부터 가을까지 나와 남편은 매일 멜론을 부지런히 사다 날랐다. 평소 워낙 입이 짧고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는 아이인데 과일 중에 멜론을 참 좋아해서 여름 내내 열심히 먹였다.
아주 옛날에야 멜론이 귀했겠지만, 사실 요새 멜론은 그리 구하기 어려운 과일은 아니다. 마트에서도 한통에 만원~만이천원 정도로 쉽게 볼 수 있고 인터넷으로 사면 큼직한 멜론이 만원 이하일 때도 있다. 아이가 매일 멜론을 찾으니까, 나와 남편은 아예 멜론 사기에 도가 터버렸다.
이틀에 한번 정도 큰 멜론 세통을 집에 들였다. 세통 중에 한통은 냉장고에 바로 넣어 차갑게 먹고, 나머지 두통은 다용도실에 하루 이틀 후숙을 하고 차례 차례 냉장고에 넣어 중간중간 꺼내먹었다. 여름 내 우리 가족이 먹은 멜론만 거의 50통은 되지 않을까 싶다.
멜론을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내가 늘 떠올리는 기억이 한 가지 있다.
8 년 전, 내가 임신했을 때였다. 우리는 결혼하자 마자 아이가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가 찾아와 준 것이 감사한 일이지만 그 땐 임신이 쉽게 되어 오히려 당황(?) 했었다. 신혼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또 내 젊은 날의 이력이랄 것이 하나 없이 애엄마가 되어버린게 싫기도 했다.
임신이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거기에 나는 입덧도 엄청 심해서 많이 고생을 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입덧이 그리 괴로운 것인지는 그 때 처음 알았다. 길가다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오고 뭘 먹어도 늘 토해내기 일쑤였다. 임신을 하고 남들은 살이 찐다던데 나는 오히려 몸무게가 빠질 정도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누룽지나 크래커 같은 것만 먹었으니 당연했다.
처음에는 아주 담백한 음식들만 골라 먹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니 아주 신 과일들이 땡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때가 1,2월 한겨울이었는데 나는 어쩐지 여름철 과일들이 먹고 싶었다. 자두나 복숭아 이런 것들. 구하기도 힘든 과일들이 자꾸 먹고 싶어졌다.
그 과일들은 당연히 먹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삭아삭한 복숭아가 먹고 싶었다. 남편에게 '복숭아가 먹고싶다' 고 징징거렸다. 한 겨울에 복숭아라니. 이 주문을 받은 남편은 황급히 마트로 뛰어갔다. 당연하지만 복숭아는 없었다. 남편은 대신 황도 통조림을 사다줬다. 그걸 먹었는데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니었다. 한 입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기운 없이 있으니 남편이 안쓰럽게 날 봤다.
어느 날 자두가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아주 새콤한 자두가 그리 먹고 싶어서 남편에게 또 칭얼댔다. 남편은 한겨울에 자두를 구하려고 해봤지만 역시 실패. 그 대신 자두스무디를 사다줬다. 나는 그것도 한 입 먹고 다 남편에게 줘버렸다.
누굴 골탕먹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내 머릿속에는 계속 먹을 수 없는 것들만 자꾸 떠올랐다. 내 유별난 입덧은 양가에 금방 소문이 났다. 입덧이 너무 심하다고 하니 양가에서 모두 걱정이 많으셨다.
어느날 아침 일어났는데, 뜬금없게도 멜론이 먹고 싶었다. 멜론은 내가 원래 좋아하던 과일도 아니고 몇 년 동안 먹은 적도 없었는데 그게 생각이 났다. 아침에 내 안부를 물으러 전화 온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겨울에 멜론이 마트에 있을까?"
"멜론...? 그건 여름에나 있지 않니?"
"역시 그렇겠지?"
복숭아, 자두 모두 실패했던 남편은 이번에야말로 멜론을 구해주겠다고 했다. 복숭아나 자두는 겨울에 정말 구할 수가 없지만 멜론은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나보다. 아침부터 남편이 마트에 전화를 하고, 청과물 시장에 전화를 하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멜론은 아직 철이 아니라서 못구한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런데 그 날 오후 우리집 벨이 울렸다. 기운 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문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 아빠가 멜론 한 통을 들고 오신 것이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멜론. 멜론을 보자마자 입에서 침이 삼켜졌다. 그 때 거의 며칠을 신 젤리만 먹으면서 힘없이 지냈는데, 그 멜론을 보니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멜론을 잘라서 내 앞에 얼른 갖다줬다. 갓 사온 멜론은 그리 시원하지도 않고 그리 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밍숭맹숭한 맛의 멜론이 너무 맛있었다. 순식간에 잘라진 멜론 몇조각을 허겁지겁 먹었다. 먹다보니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시즌에 멜론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
얘기를 들어보니 그 날 엄마 아빠도 마트에서 멜론을 찾아다니셨다고 한다. 당연히 마트에는 없었고, 어쩌다보니 백화점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 곳의 과일 바구니에 사과 배 등과 함께 작은 멜론이 포장되어 있던 것이다. 엄마 아빠가 그 멜론만 살 수 있냐고 물어보니 직원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가격은 5만원이라고 했더란다.
가격을 들은 엄마는 무슨 멜론을 5만원에 사냐고 손사레를 쳤다고 한다. 그냥 사과나 사가서 먹이자고 얘기를 하려는데, 아빠가 얼른 5만원을 내고 그 멜론을 사왔다고 한다. 엄마는 자기 임신했을 때는 제대로 봐주지도 않더니 딸이라면 사족을 못쓴다며 웃었다.
그 날 나는 5만원 짜리 멜론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나는 임신 내내 먹는 것으로 고생을 했었다. 임신 때 몇 번안되는 맛있게 음식을 먹은 기억이 그 때다.
유년시절 나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다. 우리 부모님은 늘 일을 하시느라 바빴다. 우리는 대화가 많은 사이도 아니었다. 아빠는 그리 다정한 성격도 아니었고 나도 살갑고 애교많은 딸은 아니었다. 어릴 때 나는 혼자서 책을 보는 시간이 많았다. 외로웠던 적도 많았고, 어린시절 추억이랄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내게도 소중한 기억은 있다. 마트에서 아이를 생각하면서 멜론을 살 때, 나는 동시에 임신한 날 위해 멜론을 5만원 주고 사온 아빠를 생각하며 미소짓곤 한다. 어떤 기억은 평생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걸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