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때가 온다', 나만 이 말이 불편한 걸까
24.10.03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444일 차
나는 운명을 믿는다. 삶에는 분명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 내가 이렇게 타고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 감사합니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진 시간들에는 결코 우연은 없었다. 우연을 가장한 나의 선택들이 겹겹이 쌓야 커다란 퇴적물을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의 내가 있는 데에는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가 함께 했으나, 내 앞에 놓인 선택지들은 그 개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중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고 나면 또 다른 선택지가 얼마 안 있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 또한 개수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항상 내가 원하던 선택지만이 있던 것도 아니거니와, 어쩔 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원하지 않는 선택지를 택해야만 하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젠가 분명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마주하게 된다.
얼굴에 주름이 영글지 않았다고 하여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이 남았을지 단언할 수 없다. 내 의지와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는 게 인생이고 그래서 나는 운명을 믿는다.
'누구에게나 때가 온다.'
'너는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라.'
'그때가 왔을 때 기회를 잘 잡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둬라.'
이 말이 불편한 것은 나만 그런 것일까. 보통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무언가를 제대로 이뤄본 적이 없거나, 이뤄봤더라도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비루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내뱉지 못할 말. 누구에게나 때가 온다니, 너무나 무책임하게 들리는 것은 나뿐만일까. 희망을 가장해서 허망을 심어주는 말이라 생각하는 것은 정녕 나뿐만일까.
얼마 전, 경찰이 되고 싶다던 여학생이 도로 한 복판에서 무참히 살해당해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피해 여학생과는 아무 관련 없던, 주변 식당 사장이었다. 그는 술에 흠뻑 취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을 못 한다고 했다. 몇 달 전, 정신이상자로 보이는 남성에게 일본도로 목숨을 읽은 한 가장이 있었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어떤 관계도 없던 이였다. 나의 어머니는 오빠가 둘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세 살 때 밀항해 곁을 떠난 엄마보다, 매일을 술에 절어 살던 아빠보다도 두 오빠의 존재가 더욱 소중했지만, 둘 모두 젊은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 모두, 자신이 이루고 싶어 하던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도 분명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과연 이들은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때가 왔을 때 기회를 잘 못 잡아서 이런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마주해야 했던 것일까?
과연 이들에게도 똑같이, '누구에게나 때가 온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 이가 있을까?
그래, 사랑하는 이에게, 열심히 살지만 좌절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 한 의도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그런 영상들을 보며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이란 곳에서 삶을 부대낄수록 느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의지를 가진다 하더라도 의지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이 주는, 운명이 나에게 제시한 선택지를 선택하다 보면 허무와 희망 그 경계를 매우 조심스럽게 넘나들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아직까지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
하루를 온전히 나로서 농후하게 채워가는 것이다.
그뿐이다.
내가 내 의지로 해내고자 하는 무언가를 하나 설정했다면, 이제 그 설정값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자신만의 농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내가 해내야 할 유일한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물론 말이 쉽다는 건 이미 내가 겪어보고 있음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후해지도록 해내는 수밖에 없다. 충만히 농후해졌다면, 이제 그 이후의 것들은 의지와 생각 그리고 행동의 영역이 아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떠난, 거스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의 영역인 것이다. 내가 바라는 '그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바로 내일이 그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100세가 넘어 모든 육체의 기능이 제 몫을 다 하여 소진하기 직전일 수도 있다. 언제가 됐건 그때가 올 수도 있고, 절대로 기다려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인 듯,
서울에서의 하루를 농후하게 살아보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