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미술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림을 그립답게 도화지에 그려보는 건 대학교 1학년 때 과제 이후 처음이니 거의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 당시 나는 타이트한 업무량에 꽤나 절여져 있던 때라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일터에서 쌓아 놓은 스트레스를 배출할 출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고른 선택지가 그림 그리기였다. 꽤나 정적이지만 나름의 집중력을 요하고, 순간의 끄적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이 이뤄지는 행위.
효과는 꽤나 쏠쏠했다. 2주에 한 번, 한 번에 두 시간, 수업을 받는 시간은 짧았지만,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을 써먹으려면 내 시간을 빼내어 그림에 할애해야 했다. '그린다'라는 행위는 그저 연필이나 붓 따위로 흰 도화지를 채워가는 행위가 아니었다. 첫 단계로 내가 그려야 할 것의 느낌을 머릿속으로 온전히 느낀다. 충분히 그 느낌을 담아두었다면, 이번엔 어떤 형태인지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시각적 탐색을 마쳤다고 해서 드로잉 도구를 쥐어선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다음 단계로 촉감, 질감을 담아두어야 한다. 삼차원에 존재하는 것을 이차원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일은 그 존재의 오감을 모두 표현해 내는 일과 같았다. 그래, 우리가 마치 인생을 우리의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헤쳐나가듯,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인생을 견뎌내는 일과 같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약 8회 동안 나는 오렌지를 그렸다. 내 삶을 느끼듯, 오렌지를 느꼈다. 둥그스런 모양, 그 안에 촘촘히 박힌 촉촉한 알갱이들은 조명빛을 힘껏 받아 탱탱 거 린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경계 짓는 흰 섬유들. 껍질은 눈으로 보기엔 표면이 매끄럽지만, 손가락 끝으머리로 촉감을 집중해 보면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요철들. 오렌지를 그리는 데 있어서 백미는 오렌지 껍질 특유의 매끈거리지만 미세하게 투박한 모순적인 질감과, 단면 속 알갱이들의 탱탱한 촉감이었다. 그리고 이 것들을 그리기 위해서는 '지우는 것'만이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지우개는 빛을 그리는 도구였다.아무리 연필의 흑연으로 오렌지의 형태를 그려내도 마지막 단계에 가서 그 특유의 질감을 살려내는 일은 연필만으로는 해낼 수 없었다. 그동안은 이리저리 잘못 그린 곳을 지우기에만 바빠서 뭉툭해진 지우개를 움켜쥔다. 가장자리를 칼로 가로지른다. 다시금 예리해진 지우개를 가져다가 연필심이 어둠으로 감춰버린 오렌지 알갱이 부분에 조심히 지우개를 가져다 댄다. 절대 박박 거려서는 안 될 일이다. 조심히, 천천히, 알갱이의 밑동부터 얇상해지는 끄트머리까지, 조용히 지우개로 어둠을 닦아낸다. 닦아낸 자리에는 빛이 포근하게 뒤덮여 탱글거리는 오렌지 물방울이 맺힌다.
지우개는 어둠을 몰아내는 도구였다.
삭제, 상실, 소멸, 우리가 '지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상기시키는 꽤나 어두운 단어들. 허나 지우개마저도 '지움'의 도구라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연필심이 종이 위를 무심히 지나가버린 자리를 지우개로 쓸어낼 수는 있지만, 우리가 손으로 꾹꾹 눌러 남긴 자국마저 지우개로 지워낼 수는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본인이 인생에 남겨놓은 자취들을, 본인이 선택한 최선의 시간이었을 그 자취를, 기쁜 마음으로 상기시키기보다는 되려 지우고, 잊으려고 고통스러움에 꽤나 많은 수고를 쏟는다. 애쓰든, 애쓰지 않든, 기억이 지워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겪고 느낀 감정과 경험은 자국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허나 우리는 그 자국마저도 지우려 애쓰다 불안해하고, 우울해하고, 힘들어한다. 마치 지우개로 못난 곳을 지우려 힘껏 힘주어 박박 거려 봐도, 얼룩은 번져 종이에 딱 달라붙고, 그 종이는 바래고 찢어지기만 할 뿐이듯이.
우리가 할 일은 과거의 자취를 지워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빛으로 채워나가는 일뿐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연필심의 자취에 밝은 빛을 심어주자. 더욱 그 자취를 밝게 비춰주어야 한다.
어둠 또한 우리의 과거이자 최선의 시간이었음을, 그 또한 우리 자체였음을 알고 따스하게 감싸주는 지우개를 쥐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