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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Oct 10. 2024

운동의 미학은 힘을 쓰지 않는데 있다

24.10.09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449일째


헬스를 시작한 지 이제 곧 만 2년이다. 남들은 몇 달도 안 돼서 우람한 몸과 식스팩을 갖추고 거리를 활보한다던데, 나는 2년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욕심과 조급함이 내 시야를 방해하는 통에 서서히 변화하는 몸을 외면한 탓이겠지만. 그래도 주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주에 4번은 꼬박꼬박 가지 않으면, 하루가 불안정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나쁘지 않은 신호라고 봐야 한다.


 헬스를 참 싫어했다. 지금도 그다지 헬스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른 초반엔 200만 원짜리 6개월 PT 회원권을 끊었는데도 갈까 말까였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꽤 가벼운 반성 하나 때문이었다. 내 몸이 꽤나 저질스럽다는 생각. 헬창 동생을 따라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긴 단 하나의 이유였다. 헬스장은 집에서 도보로 15분, 게다가 겨울. 귀찮음을 풍기기엔 충분한 조건이었으나, 나름의 의지를 갖고 디딘 내 발걸음은 모세가 홍해를 건너려 디딘 기적적인 발자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첫 한 달이 가장 고역이었다. 어느 부위에 도움이 되는 운동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헬스장의 기구들에 손을 댔다. 부상을 방지하려면 운동 전에 스트레칭을 해야 한다는데, 나는 스트레칭하는 시간이 제일 괴로웠다. 거대한 폼롤러로 등과 겨드랑이, 허벅지를 굴릴 때마다 실시간으로 들리는 근섬유의 고통스러워하는 외침. 허리를 좌우로 꺾고, 고관절을 늘리고 햄스트링을 고무줄처럼 늘이는 행위는 꽤나 고달픈 동작이었다. 이때쯤이면 포기해야 할 시점이었으나, 그 당시 수입이 마땅치 않았던 상황에서 무심코 끊은 회원권이 아깝던 탓에, 어찌어찌 한 달을 버텼다.


 두 달째부터는 뭔가 재미를 붙었다. 남들처럼 분할 수, 세트 수, 무게 등을 목표 잡으며 계획적으로 하진 않았어도, 기구의 쓰임새 정도는 알아갔다. 내 동작이 근육의 수행 능력을 잘 흡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영상으로 담기도 했다. 고역 같았던 스트레칭 시간이 꽤나 기다려졌다.


 6개월이던 회원 기간이 다 되었을 때, 동생을 따라 좀 더 가까운 집 근처 헬스장의 1년짜리 회원권을 등록했다. 유튜브의 여러 채널에서 운동기구를 다루는 방법과 계획적인 운동을 위한 루틴을 만드는 팁을 보면서, 나에게 제일 맞는 계획이 무엇인지 자꾸 탐색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없어도 내가 알아서 헬스장으로 걸어가는 날이 많아졌고, 앱을 깔아서 날마다의 운동 내용을 기록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인바디 측정기로 수치를 재보고 낙담과 긍정을 반복했다.


만 1년부터는 나만의 루틴이 어느 정도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기구를 쓸지, 그 기구를 쓸 때 움직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게는 얼마나, 어느 기간 정도를 두고 상승시킬지, 내일은 어떤 운동을 할지, 보다 더 계획적인 운동을 수행했다. 운동의 결과물에는 식단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싫어하던 닭가슴살을 일정치 이상 먹기 시작했다.


 2년째, 그사이 내 몸은 처음과 비교해서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과거와는 확실히 달랐다. 축 처진 가슴에는 탄력이 생겼다. 거북이 등은 꽤나 펴져 있었고, 두께감이 느껴졌다. 비실거리던 종이 인형 팔이 나름 남자다워졌다. 출렁거리는 배에는 여전히 지방이 껴 있지만, 복압을 적당히 줄 수 있을 만큼 속이 땅땅해졌다. 물론,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따로 있다. 선수 또는 정말로 헬스에 미쳐있거나 헬스를 즐겨하는 사람, 또는 식단 관리를 상당히 철저하게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유튜브에 떠들어대는 것처럼 단기간에 우락부락한 몸을 만드는 일은 꽤나 어렵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하다. 하루하루 쌓여 2년간 내가 고유하게 만든 루틴에 맞춰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면 되겠구나, 조급할 필요가 전혀 없겠구나. 이렇게 해내다 보면 나다운 몸이 되어 있겠구나. 


 가장 대표적인 가슴 운동 중에 벤치프레스라는 게 있다. 일자로 된 벤치 위에 몸을 눕히고 한눈에 봐도 무겁게 생긴 철봉을 두 손으로 잡는다. 두 손의 거리는 내 어깨너비 정도. 몸에 맞는 무게를 맞추고 서서히 두 팔꿈치를 구부린다. 철봉을 내릴 때 팔을 내린다는 느낌이 아니라, 가슴 근육이 이완되고 수축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내렸다 올리기를 반복한다. 처음엔 가슴 근육이 영글지 않아 어깨나 팔목에 무리가 갈 수도 있어서, 일정 무게를 들지 못하면 팔 굽혀 펴기로 일단은 근육이 움직임에 익숙해지도록 한다. 그 후 본격적으로 벤치에 누워 철봉을 들어 가슴 근육에 집중을 해본다. 손, 어깨, 등, 코어, 하체는 가슴 근육이 온전히 무게를 받아낼 수 있도록 협응한다. 내려갈 땐 천천히, 올라갈 땐 좀 더 빠르게, 그렇게 가슴 근육과 근섬유가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느낌을 헤아린다.


 무게가 점진적으로 늘어날수록, 내 몸의 근육은 힘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힘을 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무게를 계속해서 조금씩 무게를 늘리면서 힘겹게 수행해 봐야 근육의 움직임과 행동반경, 그리고 회복하는 기간과 성장하는 시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근육은 나도 모르게 성숙해져 있다. 힘을 쓸 때와 힘을 쓰지 말아야 할 때를 알게 된다. 힘을 쓸 때 어떤 근육을 이용해야 하는지, 또 어떤 근육은 사용하지 않아야 다치지 않는지를 채득 한 몸은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쓰임새를 일상에 적용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일에 몰입했다가 다시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자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무조건 근육을 쓰게 되어 있다. 심지어 뇌의 주름을 늘리는, 지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에 있어서도 근육의 쓰임은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적재적소에 힘을 쓰되, 그 일에 알맞은 근육과 적정량의 힘을 쓰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치지 않고, 다치지 않고, 더욱 긴 시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빼는 법을 알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힘을 쓰기 위해서는 힘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만이 더욱 삶에 집중하고 정진할 수 있다.

 운동은, 특히나 근육의 쓰임새를 보다 더 잘 느낄 수 있는 운동(사람마다 다르겠지만)은, 사람이 본인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의 근육을 길러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우락부락한 몸이나,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운동은 훌륭한 수단일 수 있으나, 우리 몸의 쓰임새를 알고 그 쓰임새가 은연중에 삶에 배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24시간을 견디는 무게추 중 하나로 운동을 두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나에게 있어 운동은 더더욱 그렇다. 하루 24시간 매분 매초에 힘만 쓸 줄 알던 예전의 나를 회상해 보면 그렇다. 온몸이 하루 종일 내가 부리는 힘에 압도되어 풀 죽어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 쥐어 짜내기만 했다는 사실을 돌이켜본다면, 아마도 나는 제대로 힘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삶의 무게를 이고 오로지 땅땅하게 수축시켜 오던 나의 일상을 이완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여전히 나의 운동 메커니즘은 부족함이 많고 올려야 할 무게는 여전히 까마득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근육의 쓰임새를 알아 간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운동이라는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깨달음 보다 훨씬 감사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루아침에 변할 수 없다. 점진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그 성장에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조화로운 호흡이 필요하다. 이완은 근육의 힘을 무턱대고 놓아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근육이 본디 그 무게를 버틸만한 긴장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되, 근육의 가동성을 더욱 늘리는 동작이다.


내 삶을 그렇게 하자.

점진적으로,

힘을 주고 힘을 빼는 너무나도 정직한 반복. 그것이 내 삶의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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