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발끝이 무겁구나. 어서 와라 영심아. 잔잔한 바당*의 너울거림을 내쫓는 비바람을 몰고 영심이 너는 예고 없이 나에게 왔다. 무거운 잿빛 구름과 차고 시린 빗물이 너의 걸음을 무겁게 옭아매는구나. 어서 오너라.
매해를 거르지 않고 내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는 태풍이 나와 함께 늙어 간지도 네가 떠나고 어언 서른 해가 넘었다. 내가 닿지 않는 저 멀고 넓은 세상이 너에게서 생기를 많이도 훔쳐갔구나. 그렇다 하여도 나는 너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이, 바로 내가, 네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리라. 네가 어멍의 뱃속을 헤엄쳐 다닐 적에, 나는 너의 태동을 느꼈다. 탯줄을 끊고 울음을 내지를 때에도 너는 내 안에서 울었다. 그날의 너의 심장 소리는 나의 태곳적 탄생만큼이나 고유했다. 네가 내 안에 살아오면서 무얼 생각하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일일이 내가 알 길은 없었다만, 영심이 네가 남기는 모든 흔적으로 나는 너를 헤아릴 수 있었다. 네가 나를 떠나 저 미지의 땅에서 수십 년간 삶에 부대꼈대도, 너의 고향 나를 잊지 못하듯, 나 또한 너를 잊지 못한다.
비양도, 나는 너의 고향이다. 네가 살아온 육지에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나는 네가 떠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네가 알던 삼춘들은 흙이 되어 나와 함께한다. 그 시절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었고, 네가 뛰놀던 분교에는 동심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하나, 그 외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세월이 너의 젊음을 훔쳐 가고 요망진* 마음을 앗아갈 때, 나는 꾸역꾸역 세월의 파도를 버티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너의 무거운 발걸음이 네가 살던 곳으로 향하고 있다. 거칠게 몰아 내쉬는 너의 숨소리를 비바람도 감추지 못하는구나. 그 숨에 네가 살아온 세월의 텁텁함이 끼어 있다. 숨을 쉴수록 더욱 초라해 보이는 너의 모습. 바람이라도 좀 잔잔해지면 좋으련만.
햇살이 비출 때면 파도의 너울처럼 파랗게 빛나던 지붕. 겉칠이 벗겨져 누르스름하게 녹이 슨 지 오래다. 파릇한 잔디가 깔려 있던 앞 마당. 바당이 파도를 이고 와 철벅대는 소리를, 너는 자장가 삼아 폭신한 잔디에 몸을 베고 새근거렸더랬지. 이제 잔디는 누렇게 늙고, 가시 달린 잡초만이 무성해진 그곳을 너는 무심히 지나친다. 네가 떠난 이후로 집 안 모든 곳엔 죽은 것들 천지다. 너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뒤편 창고에 다다른다. 아서라. 죽음보다 더 짙은 먼지가 쌓인 곳이다.
*바당 : 바다의 제주도 사투리
*요망지다 : 영리하고 제주가 많다. 야무지다 라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