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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Jul 21. 2024

회사가 30억 투자받을 때 내가 해낸 일

4장과 연결되는 장입니다. 한 번 가볍게 읽고 오세요!



마음에 맞는 투자사를 선택한 회사는 드디어 투자 유치를 위한 본격적인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이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비장하게 말하냐고 하실 수 있겠지만, 마음 맞은 투자사 만났다고 돈을 떡하니 주지는 않습니다. 꽤나 세밀하고 깐깐한 심사 단계를 거쳐야만 하죠. 회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부분을 매우 꼼꼼히 봅니다. 비전은 무엇인지, 비전을 위해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 시장성은 괜찮은지, 경쟁자들에 비해서 잘 성장하고 있는지, 그래서 향후 몇 년 후에는 얼마의 수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회사의 구성원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따질만한 것들은 다 따집니다. 당연히 회사는 이런 무수한 질문들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 자료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죠.





투자 유치를 위한 첫 업무

허드렛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저는 투자 유치 업무에 투입되었습니다. 회사의 중추가 되는 비즈니스 하나를 도맡고 있던 팀의 리더였던 저는, 평소 정리에 능한 타입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불도저처럼 투박하기 이를 때 없지만 밀고 나가는 힘만큼은 괜찮았던 업무 성향 탓에, 제가 뚫고 나간 자리에 남은 너저분한 것들은 온전히 그대로 남아있었죠. 물론 그 잔해들을 일일이 다 치우면서 전진하기엔 시간이 여유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투자 유치를 위한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일은 그 잔해들을 일일이 다시 말끔히 정리해 놓는 일과 같았습니다. 큰 틀에서만 이해하고 있던 매출과 자산의 흐름, 고객 행동의 패턴 등 경험이 쌓이면서 얻은 직관적인 판단에 도움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데이터화해서 숫자로 정리하고, 시각화하기 좋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회사가 속해있는 산업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일면식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회사의 비즈니스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업무는 그들의 시야에 맞게끔 여러 번 수정되어야 했습니다.

 투자 유치를 위한 업무를 한다고 해서 기존에 하던 일을 안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가며 자료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집에 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이때 저는 제가 왜 이런 생산적이지도 못한 일에 내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투자 유치는 회사의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자료 정리를 하는 일은 순전히 허드렛일이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이 시간에 상품 한 개를 더 팔기 위해서 미팅을 잡고 광고 문구 하나를 더 고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매 순간 했습니다. 그만큼 지루하고 고된 육체노동이었다랄까요.





투자 유치를 위한 본격적인 업무

: 발표



약 한 달여간 여러 투자사의 담당자들과 수십 번 이상 통화와 메신저를 오가며 그들이 바라는 자료를 정리하고 전달해 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자료들이 정리되고 수정되어 하나의 사업계획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이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투자사의 임원들을 설득하는 일만 남았죠. 추가로 관심을 보인 추가 투자사까지 약 10곳의 투자사를 찾아가 임원들 앞에서 사업계획서를 토대로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이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대표의 몫이었습니다. 

 제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표의 발표 자리에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날 두 곳의 발표를 하러 간 자리에서 저는 그냥 멀뚱멀뚱 히 대표가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어요. 그런데 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대표가 맡았던 발표를 제가 하게 된 것이죠.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표의 목이 정말 나가서. 둘 째는 발표 직후 있을 질의응답에 집중하기 위함. 발표 자리는 수백억 대의 자금을 굴리는 우리나라 금융업계의 굵직한 임원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로, 대표가 느꼈을 그 무게감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대표도 그런 자리는 처음이었기에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엄청 긴장을 하고 있었고, 발표 때 힘을 너무 준 나머지 두 번의 발표만에 목이 쉬어버리고 만 것이죠.

  발표만큼 중요한 게 임원들의 질문에 답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업계획서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들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으로 만들어내는데 능한 임원들에게 기싸움으로 져서는 안 될 일인데, 발표를 하면 질문을 받기도 전에 에너지가 꽤나 소진되어 버리는 것이었죠. 이런 이유들로 저는 또 자의 반 타의 반 투자 유치를 위한 투자사 임원진들 앞에서의 발표를 도맡게 되었습니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일. 저는 그저 대표의 허드렛일이나 하고 옆에서 인사나 하는 역할로만 생각했지, 이 중차대한 기로에서 이리도 큰 역할을 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학교 시절 팀플 발표가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던 기억 하나로 덥석 대표의 권유를 받아들여버린 패기는 온 데 간 데 없고 걱정과 긴장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이틀 후에 발표를 해야 했어요. 뭐 이미 닥친 일이니까 어쩌겠어하는 자포자기의 멘털이 저에게 탑재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심장이 콩닥콩닥 거리는 소리가 제 옆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긴장됐습니다. 

 이틀간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오로지 발표에만 집중했습니다. 혼자서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고, 공실에 들어가서 소리 내어 읽어도 보고, 대표 앞에서 예행연습도 해보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스크립트를 만들고 이틀 꼬박 밤을 새 가며 연습했습니다. 다행이었다면 성대의 성능이 좋아서 목이 쉬는 일은 없었습니다. 차라리 목이라도 쉬어서 내가 발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길 바라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피나는 연습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실전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만큼 긴장을 엄청했거든요. 내가 뭐라고 말을 했는지도, 어떤 표정으로 투자사의 임원들이 저를 봤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끈적거리며 느릿느릿하게 갔던 발표 전의 시간은 발표 때만 되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빠르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매번 발표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너무나 어이없고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이왕 고생한 거 제대로 경험과 기억을 담고 싶었는데 막상 남아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에 허무함이 밀려왔죠. 





회사는 30억을 받았지만

허무함만 밀려온 그날



 발표 자리 이후에도 회사는 투자 유치를 위해 몇 달을 더 고생해야 했지만,  대가로 회사는 무려 30억이라는 큰돈을 투자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표는 투자 유치를 받을 수 있었던 공에 저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말을 해주면서 고생한 보람을 서로서로 나누며 자축했습니다. 하지만 30억이라는 큰돈이 회사의 통장에 꽂히는 그 순간에도 정말이지 제 머릿속에는 제대로 된 경험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너무나도 가득했어요. 결과적으로 너무나 잘 된 일이고 그 여정에 제가 조금이나마 기여를 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축하해 주어도 이때의 아쉬움은 꽤나 오래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한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찾아왔습니다. 







회사가 30억을 투자 유치받을 당시, 저는 회사에 입사한 지 약 2년이 채 안될 시점이었어요. 다섯 명이 함께했던 회사는 어느샌가 15명 정도의 구성원이 함께 했고, 이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저는 나름의 성장통을 겪어가면서 적응하고 성장해 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표가 꿈꾸는 비전을 머릿속에 품고 향후를 내다보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어요.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 쌓인 일을 쳐내기 바쁘고, 수시로 터지는 사건 사고들을 수습하는데도 벅찼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입사해서 팀장 직함은 달고 있었지만, 실속 없는 내공이 쌓여가는 기분이 매일 들 뿐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어느 순간부터 제가 하는 일이, 제가 맡은 비즈니스가 어떻게 성장을 해왔는지 자연스럽게 머릿속 서랍장에서 책을 꺼내듯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앞에 놓인 일들 뿐만 아니라 저 멀리 놓여 있는 미션들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팅을 갈 때면 당장 앞에 놓인 숙제들만 해결하는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회사가 앞으로 해나갈 과업과 여태까지 일궈온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은 고스란히 다른 사람들에게 회사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는 기능을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투자 유치 직후에 일어난 변화들이었습니다. 단순 반복의 허드렛일이라고만 생각했던 밤샘 자료 정리 일은 저에게 회사의 흐름을 알게 해 주었어요. 투자사 임원들 앞에서 발표하기 위해 이틀간 밤을 새 가며 외던 것들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내재화되어 앞으로 회사가 해내야 할 일들이 정리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일 스타트업 (특히 초기 스타트업)에 입사하셨다면, 여러분은 아마 여러분 나름대로 그 특수성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꿈과 포부를 가지고 소중한 자신의 시간을 회사에 투자하기 위한 마음자세를 가지고 계신 분일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투자 유치 업무는 꼭 당신의 업무였으면 합니다. 


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의 투자 유치 업무에 포함되었지만, 제가 다시 만일 돌아간다면 저는 무조건 이 경험을 다시 한번 더 할 거예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보다 더욱더 깊고 강렬하게 기억들을 제 몸속에 새겨 넣을 거예요. 발표할 때 우황청심환을 미리 먹어서라도 그때의 기억을 온전히 기억해 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그만큼 저에게는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경험이었으니까요.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고 시작도 하기 전부터 걱정하지 마세요. 하다 못해 허드렛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일이라도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하고 싶다고 하세요. 투자 유치는 결코 회사만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성장에 매우 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그저 투자 유치를 받았다고 옆에서 박수나 치는 것보다는 직접 경험해 보고 새로운 일에 힘들어해 보면서 성장통을 겪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입니다.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회사와 비즈니스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체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앞으로 다른 곳에서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회사의 비즈니스를 남들보다 더 쉽게 깨우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될 거예요. 더 나아가서는 여러분이 여러분 만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꿈에 부풀어 오를 때, 막연하고 무모한 여러분의 꿈에 보다 더 섬세하고 계획적인 색채를 입혀줄 경험이 바로 이 투자 유치 경험입니다. 




여러분, 여전히 온갖 핑계를 대며 투자 유치 업무를 주저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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