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모든 것이 변한 날
사라진 유년의 빛, 영원한 기억의 길
가끔 나는 내 삶이 단 하나의 날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선명히 나뉜다고 느낀다. '이전'은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엄마의 그림자 속에서 안온하게 숨 쉴 수 있었던, 그 모든 결핍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이라 부를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이후'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심연 같은 공허함만이 가득한 시간들이다. 내 세상은 그 날을 기점으로 영원히 달라졌다.
그 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의 생일날 식탁 위에는 달콤한 케이크와 반짝이는 촛불이 놓였을 것이다. 작고 소박하더라도, 그들만의 따스한 축제가 있었을 테지. 하지만 내 가슴속에는 오직 희미한 희망만이 아릿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가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서 나를 꼭 안아주고, 환한 미소와 함께 '이제 너도 더 자랐네' 하고 속삭여줄지도 몰라.' 그 희망은 차갑고 쓸쓸한 현실 속에서도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빛이었다.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나는 낡은 창가에 앉아 마당을 내다보았다. 삐걱거리는 낡은 우물과 앙상하게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날은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어디론가 가야 하는 날이었다. 불안감이 조용히 밀려들었지만, 나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아버지가 가까이 있을 때마다 늘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던 그 익숙한 불안감. 그는 또다시 술에 취해 있었다. 그의 눈은 알 수 없는, 탁한 빛으로 번들거렸고, 그 빛은 마치 심연의 어둠 속을 헤매는 길 잃은 영혼 같았다. 엄마는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말이 자신을 안에서부터 부술까 봐 두려워하는 듯, 처절하게 스스로를 억누르는 고통 그 자체였다. 나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슬픔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윽고, 그들이 떠났다. 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집 안에는 감당할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고요함이 아니었다. 마치 커다란 돌덩이가 내 어린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바람 소리조차 나를 옥죄는 비명처럼 느껴졌다.
몇 시간 후, 나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말.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사고'라는 단어는 너무나 낯설게 들렸다. 마치 텔레비전 속 뉴스에서나 나올 법한,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멀고 먼 세상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 큰 사고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피 냄새 대신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내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후회나 슬픔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이 모든 고통과 비극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나는 그의 무관심 속에서 다시 한번 차가운 세상의 단면을 보았다. 그러나 엄마는… 엄마는 너무나도 달랐다.
처음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괜찮아질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엄마는 살아 있었다. 병문안을 갈 때면 엄마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그 미소는 한없이 여렸지만, 내게는 삶을 붙잡으려는 엄마의 처절한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의 몸은 이미 너무도 천천히, 그러나 가차 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극심한 두통이 끊임없이 찾아왔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작이 빈번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내 어린 귀에 '종양'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처음으로 들려왔다.
나는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거대한 비극의 무게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내 세상은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붕괴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그 병실을 잊을 수 없다. 벽에서는 하얀 페인트가 너덜너덜하게 벗겨져 있었고, 코를 찌르는 약품과 염소 소독제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램프는 힘없이 희미한 빛만을 토해냈다. 그 백색의 공간 속에서 엄마는 점점 더 작아져 갔다. 엄마 머리맡 탁자에는 물이 담긴 컵이 놓여 있었지만, 엄마는 그 컵을 잡을 힘조차 없었다. 나는 그 컵을 집어 들어 작은 모금씩 엄마의 입술에 대주었다. 물을 마실 때마다 혹시라도 숨이 막힐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때마다 엄마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몸을 찢는 고통과 나에 대한 한없는 사랑, 그리고 조용히 준비하는 작별 인사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눈빛 속에서 흐느끼며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다.
나는 엄마 곁에 앉아 마르다 못해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한때 그 손은 무거운 장작을 패고, 찬물에 빨래를 하고,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가족을 지탱하던 굳건한 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손은 힘없이 떨리고 있었고, 나의 작은 손바닥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마치 이 손을 놓치면 영원히 헤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처럼. 나는 그 마지막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더욱 힘껏 쥐었다.
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엄마의 숨결이 점차 끊어지기 시작했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이 가늘어지고, 이내 희미한 흔적만을 남긴 채 멎어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엄마의 축 늘어진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엄마, 제발… 제발 떠나지 마세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엄마의 차가운 이불 위로 떨어졌다. 엄마는 나의 손을 마지막으로 힘없이 쥐었고, 영원히 감기지 않을 것 같던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세상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병실 안은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간 듯, 먹먹한 침묵만이 남았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의 처절한 흐느낌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나는 울부짖고 싶었고, 엄마를 흔들어 깨워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고통으로 마비되어 듣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엄마의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나의 유년은 엄마와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에도, 그리고 엄마의 장례식에도. 그는 세상에서 지워진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이 모든 고통과 상실이 오직 나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인 것처럼. 그는 나의 삶에서 한 번도 온전한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손에 쥐어진 돈 한 푼 없었기에 버스표조차 살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텅 빈 도로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네 시간 반.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발바닥은 아려왔지만, 나는 육체적인 고통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내면의 고통이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길은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차가운 회색 아스팔트, 그 다음에는 황량한 들판만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간간이 나타나는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마른 나뭇잎을 길가로 몰았다. 나는 걷고 또 걸으며 생각했다. '이젠 집에 돌아가도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아. 아무도 문을 열어주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밥은 먹었니?' 하고 물어줄 사람이 없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생각은 더욱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심장은 너무나 강하게 움켜쥐어져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텅 빈 가슴속에는 거대한 응어리가 박혀,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바로 그 날,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이 완전히 끝났음을 깨달았다. 내 어린 시절은 엄마가 내 머리를 잘랐을 때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장난감 탱크를 주었을 때도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은 바로 여기서, 이 길 위에서 끝났다. 엄마 없이, 희망 없이, 텅 빈 두 손과 텅 빈 심장을 가진 채, 홀로 돌아오던 그 길에서.
그리고 그 날 이후, 나의 모든 생일은 더 이상 축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의 날'로 남았다. 세상이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잔인하게 앗아간 그 날로. 하지만 그 찢어진 마음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날 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나의 길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