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야기
가을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온다.
하지만 산골짜기 손라에서는 이 계절이 결코 조용하지 않다.
감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마을 전체가 숨 가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9월부터 11월 초까지.
단 두세 달 동안의 수확이 1년의 살림을 좌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을 “가지에 달린 돈”이라 부른다.
이번에 내가 만난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젊은 반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민호.
서른셋의 나이, 아직은 청년 같지만 이미 많은 짐을 짊어진 사람.
민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
고단하고, 힘들고, 늘 지쳐 보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종종 우리가 외면하던 길로 우리를 이끈다.
민호는 어느새 아버지처럼 나무를 가꾸고, 감을 따고, 사람들을 이끄는 반장이 되었다.
그에게는 어린 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이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있다.
가을은 아름답지만, 산의 가을은 언제나 변덕스럽다.
사흘째 계속된 폭우 속에서도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감은 익는 순간부터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민호의 아내와 어린 딸은 마을 어귀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
이곳에서는 “잘 다녀와”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언제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는 삶이기에, 굳이 입 밖으로 불길한 말을 내지 않는다.
그저 손을 꼭 잡고, 눈빛으로 마음을 전할 뿐이다.
과수원은 소박했다.
나무 사다리와 낡은 천막, 줄지어 선 바구니들.
편의시설 따위는 없었다.
세상과 단절된 듯, 단지 사람과 나무, 그리고 땅만이 있었다.
“물을 따로 챙기세요. 며칠 동안 씻을 수 없을 겁니다.”
함께 일하는 이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곳의 삶이 얼마나 단순하고 동시에 얼마나 거쳤는지를 실감했다.
민호는 두 해 전 반장이 된 이후, 아버지를 자주 떠올린다고 했다.
어릴 적에는 이해할 수 없던 무게가 이제야 조금은 느껴진다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아버지는 늘 무표정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항상 손에 무언가 작은 봉지를 들고 있었다.
빵, 과일, 때로는 사탕 몇 알.
아마도 어린 내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웃음이 아버지의 삶을 다시 견디게 했을 테다.
수확은 도박과도 같았다.
천막이 찢어지면 한 나무의 열매를 다 잃는다.
비가 더 쏟아지면 하루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무 앞에 서고, 사다리를 걸고, 묵묵히 손을 뻗는다.
“이제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
민호가 낮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새벽녘, 뜻밖의 전화.
아내였다.
두 살배기 딸이 끓는 물에 덴 것이다.
민호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갔다.
분노와 당혹, 그리고 깊은 무력감이 그의 눈에 번졌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숨을 고르고, 사다리를 오르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시작된 일, 그가 중간에 빠질 수는 없었다.
다행히 몇 시간이 지나고, 아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응급처치가 잘 이루어졌고, 큰 문제는 없다는 소식이었다.
그제야 민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다.
“도시에 살았다면 당장 달려갔을 텐데…
아내가 모든 걸 혼자 견뎌야 해서 늘 미안합니다.”
그의 말은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산만큼 깊었다.
감으로 가득한 바구니들이 줄지어 내려왔다.
민호는 젖은 사다리 위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차분히 움직였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날들을 살았구나.
비바람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나섰고,
집안일이 아무리 급해도 돌아올 수 없었던 날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돌아와서는 고단한 몸으로도
작은 봉지를 건네며 “아버지”로 서 있었구나.
어느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알아갈 땐 아버지와 다투었고,
돈을 벌기 시작하니 아버지를 이해했으며,
사업에 실패했을 때 아버지를 용서했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버지와 화해했다.”
나는 아버지를 잃은 뒤에야 이 구절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침묵 속에 담긴 고단함,
그의 무뚝뚝한 얼굴 속에 감춰진 사랑.
이제야 알지만, 이제는 함께 나눌 수 없다.
그래서 더 아프고, 더 허전하다.
가을 손라의 붉은 감나무 아래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늘 뒤늦게 이해하게 되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아버지의 고단함을 늦게서야 이해하는 것처럼.
그 깨달음이 비록 늦었어도, 여전히 나를 붙잡아주는 힘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