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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Feb 28. 2024

나의 주거문화사 1

산번지 : 집에 대한 기억의 시작

 집의 구조에 따라 침대가 놓일 위치를 생각하고 벽지 패턴이나 색깔, 장판의 무늬에 따라 소파의 질감이나 색을 고르기도 한다. 사람이 세간을 고민하고 선택하는 게 아니라 집이, 집의내부가 구체적인 사물들을 욕망한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생각이다. 

 침대를 갖고 싶어 했을 때 내가 살던 집은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침대라는 세간을 욕망하지 않았다. 그 초가집은 어머니가 동넷분에게 쌀 다섯 가마니를 주고 산 집이었다. 초가집이라는 이름부터 난 맘에 들지 않았다. 풀의 집. 풀로 만든 집. 새봄에 샛노랗게 이엉을 다시 이어도 마음이 개운해지지 않았다. 지붕을 새로 이어도 집의 내부는 그대로였다. 

 비가 오면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던 집, 쥐들이 천장 위를 이리저리 달리는 소리가 들리던 집. 내가 욕망하는 것보다 집이 욕망하는 것들을 먼저 깨우치게 된 그 집에서 나는 아무런 사물도 꿈꾸지 못했다. 

 그럼에도 침대에 자꾸 미련이 남았다. 내가 침대를 갖고 싶어한 건 순전히 ‘베티’라는 여자애 때문이었다. 베티는 <소공녀>라는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세라’의 친구였다. 베티는 세라가 원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때부터 세라를 전담하던 하녀였다.

 어느 날, 베티는 세라의 침대에 앉아보고는 “와, 세라 아가씨. 침대가 너무 푹신푹신해요. 내 침대는 푸석푸석한데.”라며 세라에 대한 동경과 제 신세에 대한 한탄이 섞인 눈빛으로 세라를 바라보았다. 그 장면만큼은 아직도 선명하다. 베티에게도 나와 같은 욕망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결핍을 가진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안도감, 오직 나만이 이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방바닥을 뒹굴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 때는 침대가 아직 과학이라 불리기 전이었지만 침대는 호화품이었다. 나는 어쩌면 침대를 갖고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에 엎드려 <소공녀>나 <빨강 머리 앤>을 읽고 탐구생활을 풀다가 어머니가 간식으로 내어둔 ‘썬키스트 훼미리 주스’를 마시며 그 순간의 만족스러움에 대해 미리 일기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일기장에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우리집은 이렇게 못 살아요, 라고 고백하는 걸 매일매일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만 한기가 서린 벽에 이마를 대고 벽지가 뜯긴 틈으로 보이는 언제적인지 모를 신문 기사를 읽었다. 시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당시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관한 기사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생각나지도 않고 그 때도 나는 기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활자들의 의미만이 아니었다. 나는 왜 이런 집에 살 수밖에 없는가, 나의 집에는 왜 침대를 들일 수 없는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답을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죄스러운 이야기지만 철없고 어린 마음에 부모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일 뿐이었다. 뜨끈하게 데워진 구들 위에서 몸을 녹이고 동생과 함께 군고구마를 까먹으면서 누래진 이빨을 드러내며 일없이 웃다가 헐렁한 내복을 입은 채로 곤한 잠을 잤던 곳이 바로 그 집이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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