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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Mar 02. 2024

나의 주거문화사 2

산번지 : 마을에 대한 기록

 산번지의 집에는 작은 들창이 하나 있었다. 한겨울 아침에 들창을 열면 멀리 서리가 덮인 논들이 가장 먼저 보였고 더 멀리 이웃 마을의 지붕들이 보였다. 일요일이면 교회 종소리가 얼어붙은 풍경들을 깨뜨리며 들려오기도 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은 모두 창문 너머에 있었다. 자욱한 안개가 그랬고 비밀스럽게 흐르던 냇물이 그랬고 누구 하나 돌아온 사람 하나 없는 마을의 정적이 그랬다. 간밤의 소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침을 맞을 수 있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옛날이야기 속 마을처럼 살갑지도 않고 동화 속 공간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촌스러웠던 그곳에서 나는 아무도 원치 않는 화자가 되어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기록하고 싶었다. 내가 갖고 싶은 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비밀과 금기였다. 


 가령 재형이네 둘째 형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정욱이네 가족들은 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동네를 떠났는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었다. 


 수상한 안개에 둘러싸인 마을의 굳은 결계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해방시켜 더 자유롭고 분방한 세계에서 그들을 살게 하는 것, 나는 그 일이 나의 힘으로 가능하리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첩첩산중의 마을도 아니었고 그렇게 저주스러운 일들만 일어나는 곳도 아니었는데 어린 나는 산번지의 마을에 특별한 서사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을의 맨 꼭대기에 초라하게 서 있는 나의 집을, 그리고 그 집으로부터 아직 멀어질 수 없는 나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에 공동우물이 서너 개쯤 있었고 우물물을 길어 오는 사이에도 간밤의 뒤숭숭한 이야기를 듣고 오곤 했지만 그 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같은 것이어서 사람이 바뀌고 때가 바뀌고 장소가 바뀌어, 나중에는 앞뒤 이야기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정확한 서사를 전달하려고 해도 우선 최초의 발화자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며 중간중간 이야기를 건네받고 건네주는 사람들은 죄다 대낮부터 취해 비틀거리는 주정뱅이들이었다. 당사자들은 대개 말없이 들일을 나갔다. 제 속 뒤집듯 땅을 뒤엎으며 두드리기를 수십 번, 그러면서 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그들이었다.            

  

 산번지의 마을에서 내가 기록해야 할 비밀과 금기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마을은 어떤 사람의 입도 봉인하지 않았으며 안개는 아침나절이면 금세 걷히는 것이었다. 내가 기록했던 일들은 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창대하게 시작된 나의 비밀스러운 기록은 그 해 세밑, 아주 미미한 여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일들이 없었다. 



* 본문의 인명은 모두 가명임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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