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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Apr 08. 2024

나의 주거문화사 6

산번지 : 어머니의 수건

  어떤 기념일이든 무슨 문구가 쓰여 있든 수건이 어머니 머리 위에 올라가면 어머니가 기념하고 싶은 날들은 사라졌다. 애초부터 아무것도 기념할 수 있는 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겐 모조리 다 잊고 싶은 날들뿑이었다. 바가지로 바닥난 쌀통을 긁어대던 아침과, 가물의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한낮의 발바닥과,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로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까지 모두 어머니가 꿈처럼 잊고 싶은 것들이었다. 잊고 싶은 게 많아질수록 어머니의 머릿수건의 매듭은 더 팽팽해졌다. 날카롭게 눈을 찌르던 여름햇살을 보지 않기 위해, 휘청휘청 밭이랑을 걸어오며 고춧대 함부로 무너뜨리던, 아버지의 술주정을 듣지 않기 위해 어머니는 머릿수건을 더욱 꾹꾹 눌러썼다.     


  어머니는 이따금 머릿수건을 풀고 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곤 했다. 정말로 먼 산이었다. 거기에 가기라도 한다면 고무신 밑창도 떨어지고 발바닥이 닳고, 기어이 드러난 뒤꿈치뼈마저도 으스러져버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어머니의 머릿수건에는 채 빠져나가지 않은 열기와 어머니의 땀내가 가득했다. 내가 흥건해진 머릿수건을 만지고 있으면 어머니는 더럽다며 마루 한쪽으로 치워버리곤 했다. 나는 어머니의 몸속에서 모든 물기가 빠져나갈까봐 두려웠다. 바싹 마른 수건처럼 말이다.     


  더는 못 살겠다, 아들아, 어머니는 머릿수건 대신 하얀 천을 머리에 감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릴까봐 두려웠다. 겨울밤 내내 들려오던 울음소리가 어미를 잃고 겨울산을 떠도는 수컷의 것임을 난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라보던 그 먼 산에서, 나는 발목이 잘린 채로 그렇게 산을 떠돌고, 이미 내가 남긴 발자국을, 어미의 것인 줄 알고 헤맬까봐 두려웠다. 아니, 겨울산에 내버려진 어미의 사체를 내 발로 밟고,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그것을 뜯어먹을까봐 무서웠다. 산번지의 집에서 내가 주로 꾸는 꿈은 모두 그런 꿈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살아야 하는 이유였지만, 동시에 죽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가끔 반죽음이 되어 있었으나, 대개는 죽음을 초월한 듯 살아 있었다. 나를 버리지 않은 어머니는, 당신의 지옥 같은 삶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끔 산번지의 집을 생각하면 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그 때마다 그 모습이 머지않은 미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머릿수건을 쓰려고 수건 한 장을 빼놓고도 한참을 마루에 앉아 있다. 그리고 다시 먼 산을 바라본다. 엄마, 보지 마. 어서 수건을 써. 나는 마루에 놓인 수건을 어머니 머리 위에 얹는다. 수건이 구름처럼 흘러내린다. 이미 너무 많은 물기를 머금은 수건이 마루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진다. 

  어머니가 머릿수건을 쓰고 벗은 곳이 마루였으므로 마루는 어머니의 본거지이다. 마루에서부터 사투가 시작되었으므로, 때론 아버지와 몸을 엉켜 싸우는 격전지이기도 했으므로 마루는 어머니의 링이다. 어머니는 마루 한복판에, 생의 한가운데에 하얀 수건 한 장을 던진다. 아무것도 기념할 게 없어서 아무런 글귀도 쓰이지 않은. 

   살비듬처럼 눈발 흩날리는 겨울날, 투항이 마른 눈물의 말임을 깨닫는다. 오늘을 이겨도 오늘보다 더 질기고 강한 내일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던 그 마루 위에서, 어머니는 뒤늦게 자식 이기는 어미가 된다. 그러나 먼 산은 여전히 멀다. 산자락에 누운 어머니의 발끝은 마루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얼굴이 젖는다. 짱짱하게 내걸어진 수건이 지척이지만 나는 얼굴을 닦을 수도 손을 뻗을 수도 없다. 어머니, 꾹꾹 눌러 죽인 머릿니들이 희끗희끗 날리는 햇살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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