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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Mar 25. 2024

나의 주거문화사 5

산번지 : 아버지의 가방

  산번지의 집에서, 아버지는 늘 있다가도 갑자기 없고, 내내 없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있기도 했다. 그것은 내 기억의 한계이기도 했다. 

 

  나는 마루에 앉아 산번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나의 일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타지에 나가 일을 할 때가 있었고 그 날은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오는 날이었던 것 같다. 갈빛 얼굴의 아버지가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아버지의 손에는 갈색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 가방에 그려진 그림이 아직도 뚜렷하다. 말이었다. 말은 지쳐 보였다. 고단한 여정을 마치고 이제 막 마굿간에 들어선 말처럼 갈기는 쇠해 보였고, 잔등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잠깐 마루에 앉아 있다가 방으로 들어가 이내 잠이 들었다. 아버지 숨쉬는 소리에 맞춰 갈색 몸통이 떨리고 있었다. 가방에는 풍이 든 흔적처럼 구멍이 몇 개 나 있었다. 그 구멍 속으로 손을 밀어넣으면 손목이 쑥 들어갔다. 망치와 톱 따위가 만져졌다. 나는 구멍 속으로 몸을 더 밀어넣었다. 신기하게도 구멍은 더 커져 몸 전체가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어지럽게 널린 연장들을 가장자리 쪽으로 밀어냈다. 가방의 내부는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어디서 쓸려와 쌓인 건지 가방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손바닥으로 그 먼지를 닦아내자 길이 드러났다. 길섶에 푸른 갈잎처럼 비어져 나와 있는 게 있었다. 그 끝을 잡아당겨 보았다. 사탕 봉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스카치캔디였다. 사탕 하나를 집어 투명한 껍질과 초록색 껍질을 차례로 벗겼다. 사탕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사탕을 혀로 녹여가며 길을 걸었다. 언제고 꼭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되도록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시간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절은 봄인 것 같기도, 여름인 것 같기도 했다. 뙤약볕에 이마가 흘러내릴 것처럼 더웠다. 걸을수록 길은 더 아득했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의자가 있었다. 언젠가 앉아본 적이 있는 의자였다. 일어설 때마다 튀어나온 못에 뒤꽁무니가 걸렸던 게 떠올랐다. 나는 길섶을 헤적여 망치를 찾았다. 망치가 그런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망치는 수월하게 손에 들렸다. 나는 튀어나온 못머리를 향해 힘껏 망치질을 했다. 여러 번 망치질을 해서 겨우 못머리를 밀어넣었다. 그런데 길가에 나란히 못머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다시 망치질을 했다. 쾅, 콰쾅, 주변의 꽃잎들이 뭉개지고서야 못을 다 박을 수 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길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가던 길을 마저 가야 하는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그 때 길섶에 초록의 빛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사탕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가 터질 정도로 사탕을 집어넣었다. 사탕을 하나 꺼내 투명한 껍질을 벗겨내면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반딧불이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빛을 내는 것처럼 환했다. 그리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금방 허기가 졌다. 사탕을 먹고 또 먹었다. 이제 주머니에 남은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지막 사탕의 껍질을 벗겼다. 초록색 껍질을 완전히 벗겨냈을 때 그 안에 있는 건 사탕이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사탕껍질로 감쌌다. 그리고 길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모든 계절을 불렀던 힘으로 입김을 불었다. 다시 먼지가 쌓였다. 먼지는 단단하게 굳어 지층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가방 속에 있었다. 가방의 면에 귀를 가까이 댔다. 아버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거기 있어서인지, 당신이 거기에 아직 잠들어 있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당신이 있어서인지, 그 때는 알지 못했다. 난 단지 가방 안에 있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가방 속이 답답하게 느껴진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지만 내 몸을 삼켰던 커다란 구멍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아주 작은 구멍 속으로 빛 한 줄기가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방의 둘레를 빙 돌아보았다. 드문드문 사탕껍질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껍질 중 하나를 이불처럼 펼쳤다. 그리고 가만히 몸을 뉘였다. 바람이 불었다. 초록껍질이 내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허공에는 빛들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빛들이 투명한 캔버스처럼 오려져 내 몸을 덮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군가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렁그렁 쏟아지는 눈빛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뜨지 않았다.


 한참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산번지의 집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 영영 없어지고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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