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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Jul 26. 2024

침대에서의 사색

2017학년도 3월 2학년 학력평가

 

  섬유 예술은 실, 직물, 가죽, 짐승의 털 등의 섬유를 오브제 로 사용하여 미적 효과를 구현하는 예술을 일컫는다. 오브제란 일상 용품이나 자연물 또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의미한다. 섬유 예술은 실용성에 초점을 둔 공예와 달리 섬유가 예술성을 지닌 오브제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섬유 예술이 새로운 조형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결 정적 계기는 1969년 제5회 ‘로잔느 섬유 예술 비엔날레전’에서 올덴버그가 가죽을 사용하여 만든 「부드러운 타자기」라는 작품을 전시하여 주목을 받은 것이었다. 올덴버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공예의 한 재료에 불과했던 가죽을 예술성을 구현하는 오브제로 활용하여 섬유를 심미적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섬유 예술은 평면성에서 벗어나 조형성을 강조하는 여러 기법들을 활용하여 작가의 개성과 미의식을 구현하는 흐름을 보였는데, 이에는 바스켓트리, 콜라주, 아상블라주 등이 있다. 바스켓트리는 바구니 공예를 일컫는 말로 섬유의 특성을 활용하여 꼬기, 엮기, 짜기 등의 방식으로 예술적 조형성을 구현하는 기법이다. 콜라주는 이질적인 여러 소재들을 혼합하여 일상성에서 탈피한 미감을 주는 기법이고, 아상블라주는 콜라주의 평면적인 조형성을 넘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과 폐품 등을 혼합하여 3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다. 콜라주와 아상블라주는 현대의 여러 예술 사조에서 활용되는 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섬유 예술에서는 순수 조형미를 드러내거나 현대 사회의 복합성과 인류 문명의 한 단면을 상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섬유를 오브제로 활용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라우센버그의 「침대」가 있다. 이 작품에서 라우센버그는 섬유 자체뿐 아니라 여러 오브제들을 혼합하여 예술적 미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침대」는 캔버스에 평소 사용하던 커다란 침대보를 부착하고 베개와 퀼트 천으로 된 이불, 신문 조각, 잡지 등을 붙인 다음 그 위에 물감을 흩뿌려 작업한 것으로, 콜라주, 아상블라주 기법을 주로 활용하여 섬유의 조형적 미감을 잘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라우센버그는 자신의 작품 '침대'에 대하여 회상하며 '사실 그릴 것이 없었기 때문에 침구류를 배치'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예술의 영역에서 소재주의는 늘 비판을 받아왔지만 사실 구체적인 소재를 떠나 비롯될 수 있는 작품은 없다. 소재의 물리성이나 가시성은 중요하지 않다. '먼지 한 톨',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 '바람 한 점'으로부터 시작된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그것을 방증한다. 

 소재가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도 소재는 있다. 없음의 소재, 대개 그것은 정신의 영역이 주관하는 소재들이다. 현재 부재하는 것들, 결핍과 결렬된 것들 중에서 욕망하게 되는 '있어야 할 것'들. 그것들을 궁리하다가 '섬유예술'과 같은 장르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예술이 거느리는 하위영역들도 소재로부터 발생한 셈이다.

 라우센버그는 고갈된 영감의 숲을 서성이다가 '침대'라는 걸작을 만들게 되었다. 사실 영감이란 침대 위에 놓인 덧이불이거나 침대보에 지나지 않는다. 침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침대는 침대로서서의 기능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침대 위에서 어떤 꿈을 꾸는가가 창작의 질을 좌지우지한다고 볼 수 있지만 꿈이란 본래 꿈꾸는 자의 능력이 아닌, 침대가 부여하는 '소일거리'일 뿐이다. 그러니 쓰거나 그리거나 무엇이든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만의 '침대'가 더 남루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까지 '없는' 소재에 관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없음은 언제나 새로이 있게 될 것들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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