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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Aug 02. 2024

'나'를 지키는 일

2024학년도 대수능

    

  너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하느냐? 잊는 것은 병이 아니다. 너는 잊지 않기를 바라느냐? 잊지 않는 것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잊지 않는 것이 병이되, 잊는 것이 도리어 병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근거로 할까?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이 옳을까? 

  천하의 걱정거리는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잊어도 좋을 것은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는 데서 나온다. 눈은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잊지 못하며, 입은 맛난 음식을 잊지 못하고, 사는 곳은 크고 화려한 집을 잊지 못한다. 천한 신분인데도 큰 세력을 얻으려는 생각을 잊지 못하고, 집안이 가난하건만 재물을 잊지 못하며, 고귀한데도 교만한 짓을 잊지 못하고, 부유한데도 인색한 짓을 잊지 못한다. 의롭지 않은 물건을 취하려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실상과 어긋난 이름을 얻으려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는 자가 되면, 어버이에게는 효심을 잊어버리고, 임금에게는 충성심을 잊어버리며, 부모를 잃고서는 슬픔을 잊어버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정성스러운 마음을 잊어버린다. 물건을 주고받을 때 의로움을 잊고, 나아가고 물러날 때 예의를 잊으며,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제 분수를 잊고, 이해의 갈림길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잊는다

  먼 것을 보고 나면 가까운 것을 잊고, 새것을 보고 나면 옛것을 잊는다. 입에서 말이 나올 때 가릴 줄을 잊고, 몸에서 행동이 나올 때 본받을 것을 잊는다. 내적인 것을 잊기 때문에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게 되고,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내적인 것을 더더욱 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잊지 못해 벌을 내리기도 하고 재앙을 내린다.    

  남들이 잊지 못해 질시의 눈길을 보내며, 귀신이 잊지 못해 그러므로 잊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꿀 능력이 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잊어도 좋을 것은 잊고 자신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지 않는다.


                                                                                                    - 유한준, 「잊음을 논함」


  잊어야 할 것들을 잊지 못하고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만다. 잊어야 하는 것들의 목록은 사실 너무나 단순하다. 욕심이나 미련이고 모두 '외적'인 가치들이다. '나'가 세간의 무엇인가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궁핍이라 여길 때 더 많은 것들을 잊게 되고 그것은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효와 충, 슬픔이나 정성, 예의와 의로움 따위는 모두 인간이 갖고 있는 본래의 마음, '내적'인 가치들이다. 

  내적 가치를 잊고 행하는 일들이 모두 '벌과 재앙'으로 연결되진 않을 것이다. 간혹 더 많은 재물과 권세를 얻어 '징벌'이 아닌 '상'을 받게 된 것이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잊지 않음'이 더욱 필요하다. 무엇을 잊어야 하고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잊지 않으려는 본래적이고 순수한 욕동이 필요하다.*

  좀더 나아가서 기억은 이벤트가 아니다. '잊지 않음'은 호명의 일이다. 그 호명이 '나'의 내적 세계와 함께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로 향할 때,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를 어떤 신념 따위의 충일한 가치에 복종하게 할 때, 그것 역시도 본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억하는 일들로도 우리는 순례와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당신은 왜 그것을 생각하나요?

  저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고 언제나 그것을 생각할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끝낼 수 없는 생각입니다.**


  그것에 대해 잊지 않고 오래 생각하는 시간과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은 '나'를 지키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 모두에게 잊히는 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 때의 (자신을 향한 타인의) '잊음'은 자기 본래의 것을 기억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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