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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 Jeonggeul Jul 06. 2022

마흔 하나에 임신.(1)

여긴 베트남이거든요.

내 나이 올해 41.

2022년이 시작된 1월 중순경,

나는 홀로 타국생활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로 왔다.

남편은 2017년 여름, 대구에 있던 한 회사에서 베트남으로 파견되어  해외출장을 나오게 되었다.

당시에 우리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남편은 홀로 베트남행을 택했고, 나는 친정에, 아들은 시댁에... 우리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그러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는 2019년 시댁으로 향했다.

홀로 남겨진 아들이 눈에 밟혀서였다.

그렇게 시댁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나와 남편은 사이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고,

시댁어른들과 친정부모님은 모두 합가를 원하셨다.


나도 신랑없는 시집살이를 하려니 서러운 마음도 반, 그리고 남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도 반.

이렇게 마음이 커지니 당연히 합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빠가 없는 아들도 기가 죽어서 학교생활을 하는 모습이 늘 안쓰러웠다.

동네 친구들이 주말이면 아빠와 함께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향하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들의 모습.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친구들. 가족단위로 나들이를 가던 친구들의 모습등등을 보고서도 내색없이 어떤 말도 안했지만, 나는 아들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더 아팠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래선 안되겠다는 마음에 하루빨리 우리가족이 살 집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남편은 뜻하지 않게 베트남에서 계속 생활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시댁어른들과 친정부모님도 모두 내심 놀라시면서도, 섭섭하시기도 하셨었지만, 아들의 그리고 사위의 뜻이 그렇다 하니 그냥 나와 아들을 베트남으로 밀어줘야 겠다고 마음을 굳히셨다.

나 또한 기대에 없었던 이민이었던지라, 자신이 없었다.

늘 친정부모님 그늘에서 벗어난 적 없었던 나는, 한국을 떠나더라도, 우리 부모님걱정에 쉽게 마음이 서질 않았다.

하루는 친정엄마가 내게 뜬금없이 전화가 와선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내 꿈은 니가 아들이랑 남편이랑 같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죽는거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왜 갑자기 그런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내가 없이는 우리 부모님이 못 살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반대였던 모양이다.

내가 부모님 옷자락을 잡고 놔주지 않았었나보다.


친정엄마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마음 한켠이 시원해진 느낌은 왜인지 모르겠다.

숙제처럼 남겨졌던 부모님모시기.

내 발을 스스로 묶어놓고서는 자립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기까지 했었는데

역시 자식의 제 갈길 찾아가게 밀어주는 것이 부모 마음인가보다.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것. 자기 할 도리를 다 하는 것. 그게 효이지. 그 이상은 하려한 내 자신이 너무 과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마음을 먹고 나니, 베트남으로 건너오기까지의 여러가지 변수는 많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일먼저, 아들이 다닐 학교를 정하고 그 다음은 집을 정하고, 베트남 호치민으로 부터 입국승인 서류를 기다리고, 비행기티켓을 끊는 순서대로 크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중간에 학교를 정하기까지의 과정과 베트남으로 부터 입국승인 서류를 기다리기 위해 몇번의 반복처리된 절차들이 꽤 애를 먹였지만, 조바심이 났던 뿐이지, 모든 일은 순리대로 착착 진행되어 나갔다.


언제 그 많은 절차들을 다 해치웠는지 놀라울정도로 시간은 빨리 흘렀다.

비행기 탑승일자가 다가오자, 시댁어른들과 친정부모님은 내심 서운해하셨다.


'코로나가 끝나고 하늘길이 열리면 우리 다시 만나자.'


 하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마지막으로 나와 아들은 인천공항에서 호치민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베트남으로 입국한 날은 한국의 설과 같은 베트남의 뗏 연휴와 맞물려 있었다.

자가격리 3일을 끝내도 7일정도는 남편과 함께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다는 취지로 떠난 여행.

푸꾸옥으로 가서 우리 세식구는 신나게 놀았다.

물놀이를 원없이 하고, 아들과 아빠는 함께 서로 뛰어다니며 놀고, 세끼 식사도 호텔식으로 푸짐하게 먹고, 잠도 잘 잤다.


 그리고 나는 재회한 남편과 하루 뜨밤을 보냈고, 그 하루만에 덜컥 임신이 되었다.


  아이를 낳고 5년만에 둘째가 들어섰던 적이 있었다.

쉽게 들어서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그렇게 들어섰던 둘째가 그만 유산이 되고 말았다. 그 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삶의 온통이 내 곁에서 떠나버린 둘째 생각이었다. 나는 처절히 아파했다.

아이를 잃고 나서 재작년까지는 슬퍼만 하다가, 작년부터는 아이를 위해 빌고 또 빌었다. 이제는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고.

그렇게 둘째를 영혼으로 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볼 때 마다 늘 동생을 못 낳아줘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외동으로 자라서 외로워보이고, 형제들이 함께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든든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 동생은 내게 숙제와도 같은 숙업이었다.


한 방에 임신이 된 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 같이 기뻤다. 남편에게 이야기 하니 처음엔 믿지 못했지만, 테스트를 여러번 해서 보여주니 그 때부터는 기뻐서 방방방 뛰었다.

남편은 둘째가 생긴것도 기뻐했지만, 자신의 한 방에 아이가 생겼다는 자부심에 더 기뻐한듯 했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어쨌든 좋은 일에 좋은 일이 겹치니 웃음만 나왔다.


첫아이때 기억을 되살려 임신 초기에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12주가 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쇼파에 누워 몸을 불렸다. 행여나 아이를 잃을까 나는 자궁이 안정되고 튼튼해질 거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열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4월 초. 12주가 되자 병원을 찾았다.


여기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의사와 과연 말이 통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엄마들커뮤니티에 물어보니, 종합병원엔 한국인통역사가 다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집과 가까운 종합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을 했다. 남편또한 직장에 잠깐 시간을 비워서 우리는 함께 찾아갔다.

한국인통역사를 찾았다.

"안녀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 이 정 님 맏으시죠?"

"네 맞습니다."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그래도 한국말이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배워서 나같은 환자들을 위해 일해주는 통역사가 너무 고마웠다.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을 직업으로 가졌는지 감탄하면서 말이다.

통역사는 의사선생님께 나를 인도했고, 우리는 첫 대면을 했다.

친절한 인상의 여성의사선생님이셨다.


먼저 초음파로 아이를 봤는데, 임신하고 첫 초음파라서 그런지 아이가 굉장히 큰 것 같았다. 깜짝 놀라서


"왜 저렇게 커?".


라고 혼잣말로 물었더니,


"지금 십 이 주 이시기 때문에 정상입니다."


라고 통역사가 말해주셨다.

얼굴을 보는데 첫 애때 모습과 완전 판박이였다. 심장도 건강히 뛰었다. 아들일까 딸일까.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그날 알 수는 없었다.


"노말"

"아 이  . 정 상 임 니 다."


"..."

"감사합니다."

나는 두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하늘로 먼저 간 둘째가 보내준 선물 같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이제 앞으로가 더 중요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022.07.06

브런치작가 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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