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된 약속

마음 따뜻한 후배 이야기

by 바람아래


12월이 되면 추운 날씨 탓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이 계절에 제법 잘 어울리는 귀여운 욕심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평소 우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매사에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후배가 있다. 여러 직장을 거쳐 현재 직장에 안착했고, 결혼도 하고 어렵게 얻은 아이를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친구다. 지난가을부터 집안사정과 육아 문제로 휴직 중인 그가 점심 한 끼 같이 하자며 나를 찾아왔다.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휴직 중이라 그런지 얼굴이 아주 건강해 보인다고 했더니, 그는 아이 돌보느라 정신없어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런데 확실히 출근할 때보다 몸은 좋아 보였다. 피티라도 받고 있냐고 물었더니, 사실 얼마 전에 기막힌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20년 전 대학교 다닐 때 길을 가다 우연히 조혈모세포 기증 서약을 했다고 한다. 젊은 혈기에 조혈모세포가 뭔지도 모른 채 서약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최근에 그와 맞는 환자를 찾았으니 기증 의사를 다시 확인하려고 전화한 것이었다.


담당자에게 환자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두렵기도 했지만, 기왕 서약했던 것이니 아내와 상의도 하고 고민 끝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기증자인 자신이 최상의 컨디션일 때 수증자도 건강할 것 같아서 곧장 술도 끊고 운동하며 몇 달 동안 컨디션 관리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몇 달씩 컨디션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기도 하고, 혹시 수증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거꾸로 먼저 기관에 연락을 해봤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수증자도 마찬가지로 컨디션이 좋을 때 기증받으려고 운동하고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다 보니, 기증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호전되었다는 것이었다.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양쪽 모두에게 해피엔딩이었다. 후배도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다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서약이라는 약속을 했으니 지키는 게 마땅하고, 더군다나 한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이었기에 비록 아무 정보도 없는 분이지만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결과적으로는 양쪽 다 해피엔딩이지만, 그런 결심을 하고 행동으로 옮긴 후배의 모습을 보면서 '존경'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싶었다. 나이가 많다고, 직급이 높다고 존경받는 게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마음으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존경받을 자격을 갖는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존경받아 마땅한 후배를 두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런 후배에게 더 큰 복이 올 거라는 믿음은 의심하지 않지만, 당장 오늘 이 시간은 질투라도 하듯 그를 자유롭고 편하게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최근에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를 모시고 대학병원을 오가고 있고, 그런 아버지 대신 아침저녁으로 고향집 소를 돌봐야 하며, 오후에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후배의 둥근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 한편이 짠해진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부모의 아들로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좋은 일들이 가득할 그 후배의 멋진 인생을 응원하고 싶다.


꼭 12월이 아니더라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더 이상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또 다른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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