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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아래 Apr 24. 2023

잠시 멈춤

지치고 힘들 때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몇 년 전 초 여름이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정신은 이미 가출 한 지 오래.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렵게 잠들었어도 새벽 1~2시 즈음되면 잠에서 깨는 날 또한 많아지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음속에는 항상 뭔가 모를 갑갑함이 가득했다.


그런 증상으로 인해 생활은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으니 가족들에게도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민감해졌고 가족들에게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불면증 소견이 나왔다. 그때 의사 선생님은 수면제 처방을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약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단 스스로 이겨내 보겠다고 의사에게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가끔씩 주말 아침에 집 근처 둘레길을 걷기도 하고, 나지막한 앞 산을 오르기도 했었다. 산이나 숲을 걸으면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아무래도 걷다 보면 맑은 공기와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에서 좋은 에너지가 굳어있던 몸과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듯했다.


그즈음 인근 산에서 백패킹이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TV 프로그램이나 여러 블로그를 통해 도전해보고 싶었던 일중의 하나. 집안 어딘가에 몇 년째 처박혀 있던 덴트(3인용)와 침랑만 챙겨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친구 2명과 함께 무작정 떠났다. 15킬로그램 정도의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려니 5분도 안되어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1시간 정도를 걸어 박지에 도착했다.


산 정상이 높지 않았지만,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의 위력은 대단했다. 강력한 바람을 맞으며 겨우겨우 어렵사리 덴트를 치고 잠시 바닥에 누어 바람에 식어버린 몸에 온기를 불어넣어줬다. 간편식으로 저녁을 가볍게 때우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난 뒤 잠을 청했다. 하지만, 텐트 밖에서 바람의 여전히 거칠었다. 바람 때문에 나무 가지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갈 때와 풀숲이 요동치며 들리는 소리, 아기울음처럼 들리는 고라니 울음소리잠을 수가 없었다.


숙면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평소에 듣거나 느낄 수 없었던 바람, 풀, 나무, 고라니 등 자연의 소리를 듣고 느꼈다. 새벽 3시경이 되어서야 바람은 잦아들었다. 잠시 나가 밤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진다. 얼마 만에 보는 별들의 향연인지. 그런 기억조차도 가물거렸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고 슬슬 잠이 오기시작했다. 이윽고 잠이 들었다. 짧지만 오래간만에 꿀잠을 자고 있는데 밖에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저 눈이 떠졌다. 사람들은 이미 물안개 가득한 계곡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일출을 감상하고 있었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빛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그런데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개운함'인지. 날아갈 듯한 기분과 함께 몸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떠오르는 일출에서 뻗어 나오는 태양의 기운 또한 텅 빈 몸과 마음을 한가득 채워줬다. 그제야 사람들이 맛에 백패킹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반 등산객들이 올라오기 전 모든 짐을 정리해 철수했다. 집에 도착한 나를 보자마자 아내는 "당신, 지난밤에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되게 좋아졌어!"하고 반긴다. "일은 무슨 일, 그냥 텐트 치고 친구들이랑 떠들다 잠든 전부야. 물론 바람소리, 풀소리 때문에 많이는 못 잤어"라고 대답 뒤,  거울로 모습을 유심히 봤다.


아내 말대로, 전 날까지 썩어있던 내 얼굴에 오래간만에 생기가 돌아보였다. "당신, 산하고 맞나 봐, 원하면 산에 자주가! 필요한 장비도 사서 안전하게 다녀"하며 반겼다.


그날 이후 머리가 복잡하고 심란할 때면 자주 산을 찾았다. 혼자 갈 때도 있고, 친구 한 두 명이 같이 갈 때도 있었다. 역시 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오면 몸과 마음은 늘 상쾌했다. 그 이후로는 불면증 증세도 차츰 사라졌다. 모든 일상이 원상 복구되었다.


산이라는 자연이 주는 긍정적인 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서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걸로 안다.

누군가 지치고 힘들 때면 잠시 멈추고 산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꼭 산이 아니어도 좋다. 바다, 강, 호수 등 어디든 좋다. 그냥 하던 일 잠시 멈추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보기를 권한다. 




지난 주말 올해 첫 백패킹을 섬으로 다녀왔다. 바람이 조금 불어서 그런지, 캠핑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바다가 제일 잘 보이는 곳에 텐트를 쳤다. 제주도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을 오션 뷰다.

그랬듯이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다른 친구가 보내준 커피를 내려 마시며 10개월 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 꽃을 피우다 잠이 들었다. 역시나, 오래간만에 꿀잠이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짐을 챙기고 뱃시간이 될 때까지 바닷가에 앉아있었다. 물은 썰물시간. 마을의 한 노부부가 물이 다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물이 다 빠지면 그 앞에 드러나는 뻘에 가서 바지락, 낙지 등을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갑자기 할머니는 자갈밭 위로 자기 집 안방처럼 그대로 편하게 누우셨다.


그렇게 10여분을 누워있다가 갑자기 할머니의 현란한 스트레칭이 시작됐다. 일바지(몸빼)에 장화를 신으시고 연세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게 다리를 하늘로 쭉쭉 벋으시면서 운동을 하셨다.

할머니의 그런 행동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었겠나 싶다. 그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고 너무 자유롭고 익숙해 보였다. 할머니의 현란한 움직임을 보다가 뱃시간이 되어 하룻밤을 온전하게 보내게 해 준 오션 캠핑장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하는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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