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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아래 Apr 21. 2023

봄날, 그녀는 예뻤다

104세 소녀는 꽃 보다 아름다웠다

충남 서산에는 (우리가 아는 흔히 볼 수 있는) 벚꽃이 지고 나서야 피는 우리나라 재래종 왕(겹)벚꽃과 청벚꽃으로 유명한 개심사(해미)라는 절이 있다. 이와 함께 문수사(운산면)의 겹벚꽃 또한 유명하다. 몇 해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그곳 문수사를 며칠 전에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찾았다. 평일 저녁임에도 방문객들이 꽤 됐다. 그날의 행복감을 되새겨 보았다.


우리는 주차장을 지나 문수사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는 말로만 듣던 주먹만 한 분홍빛 겹벚꽃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마다 한 장씩 날리는 꽃잎과 그 꽃잎이 날리는 순간에 맞춰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연인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정겨워 보인다.

그렇게 꽃과 자연을 감상하며 겹벚꽃 터널을 따라 10여분을 걷다 보면 '상왕산 문수사'라는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 뒤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언덕부터 포토존이다. 수많은 연인들, 다정한 가족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추억을 사진에 담는다. 이 아름다운 꽃터널은 마치 런웨이 같다. 피사체가 된 사람들은 모두 모델이 되고 누구나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로 그냥 막 찍어도 작품이 되는 마법이 펼쳐진다. 적어도 이 황홀한 찰나에 누구 하나 근심 있는 얼굴을 갖고 있는 이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꽃구경 사람구경을 하며 200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문수사에 다다른다. 다음 달 부처님 오신 날을 위해 벌써부터 불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 보인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울긋불긋 화려한 연등들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해가 지는 시간임에도 연등들의 색상이 벚꽃만큼 아름답다.


문수사 마당에서 우리가 올라온 길을 잠시 내려다본다.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이곳이 최고의 뷰포인트. 청량감을 물씬 풍겨주는 짚 푸른 녹음과 첫눈에 가슴 설레게 하는 겹벚꽃 분홍색의 조화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칠 줄 모르는 아드레날린, 이런 수려함을 보기 위해 수년을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는 순간이다.

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순간 우리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일 가족. 벚꽃처럼 분홍색 점퍼를 입으신 할머니를 꽃 화단 앞 벤치에 모셔 놓고 연신 사진을 찍는 머리 희끗희끗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자 두 분이 보인다. 친구와 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그들의 표정을 살핀다. 


나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겠다는 동물적 감각으로 이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옆에 서있던 친구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사진을 찍고 노인을 부축하며 걸어오면서 그들과 친구의 눈이 마주친다.


이때 한 남자가 먼저 "저희 어머니께서  이번에 104세가 되셨어요. 어머니하고 꽃구경 왔어요!, 저희 어머니 건강해 보이시죠?" 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네, 너무 정정해 보이시고 좋아 보이십니다. 어르신 모습 니까, 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하며 친구가 미소로 답을 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본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일상적인 장면인데, 그 순간 나는 무언가 가슴속에 묵직한 울림을 느낀다.


104세 할머니의 정정함에 한번 놀라고, 그 순간을 즐거워하시는 할머니의 표정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소녀 같다'는 표현은 너무 식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순간만은 예외다. 이 보다 더 완벽하게 어울리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리고 두 아드님들의 세상 모든 평안과 선함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도 인상적이다. 어떤 형식과 가식이 없는 진정으로 부모님을 챙기는 그들 모습이 뭔지 모를 감동을 전해준다.




할머니의 연세 104세를 짖꿎게 역산해 봤다. 1919년에 태어나셨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다.


할머니의 삶은 대한민국 근현대사 그 자체, 살아있는 역사책이자 역사의 산증인.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해방, 한국전을 겪으셨고 4. 19 혁명, 6.29 선언 등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웠던 모든 일들을 다 겪으셨을 터. 그 질곡의 세월 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며 얼마나 고된 삶을 사셨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경외감 마저 든다. 


상수(上壽, 100세 이상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동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건강을 여전히 갖고 계시며, 선한 얼굴과 예의를 갖춘 두 아드님을 키우신 '대한민국의 진정한 어머니'가 아닐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그 처럼 강하다.



그날의 104세 소녀는 그래서 여전히 더 아름답다.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그녀의 삶, 인생의 희로애락이 기어이 겹겹이 겹벚꽃으로 피어나지 않았을까......
부디 그 해맑고 건강하신 모습으로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오래오래 겹벚꽃 구경하러 오시기를......

그녀 덕분에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움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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