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1)

낙오자

by Neutron

테이블 위 동전을 노려보고 있다. 깊고 고요한 공간에 오로지 나와 또 하나의 물체만 존재한다. 그 금속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분자와 원자의 진동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원자의 진동을 떠올리고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증폭시켰다. 원자의 진동이 증가하며 동전은 테이블 위를 서서히 미끄러져 갔다. 그 현상에 놀라는 순간 동전은 멈춰 섰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뇌파증폭기를 벗어 놓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모니터에 그려진 그래프의 패턴은 매우 복잡한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부르던 일이 바로 내 앞에서 벌어졌다. 손을 대지 않고 생각만으로 동전을 움직였다.


나는 다시 장비를 머리에 쓰고 동전을 노려본다. 이번에는 매우 강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동전뿐 아니라 주변 모든 물체의 고유진동수를 알 수 있다. 뇌파를 최대치로 증폭해 본다. 동전과 테이블과 모니터와 벽과 바닥과 천장 등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들의 떨림이 감지되었다.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그 사물들은 실제로 떨리고 있었으며 진동이 최대치에 이르자 바닥이 갈라지고 천장이 무너졌다. 벽의 타일들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결국에 와르르 무너진다. 나는 바닥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깊고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눈을 떠보니 딱딱한 바닥이 느껴진다. 나는 차가운 방 안에 누워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벽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사람의 눈동자가 보였다 사라진다. 소름이 돋았다. 커튼 사이로 골목길 가로등 빛이 새어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잠을 깨면 다시 눈을 붙일 수 없다. 가끔 반복되는 꿈이 하필 오늘 찾아왔다. 핸드폰을 보니 새벽 2시를 지나고 있다. 오늘 오전에는 중간고사가 있다. 이 시험을 위해 일주일을 꼬박 바쳤다. 좋은 컨디션과 맑은 정신으로 등교하자는 다짐과 함께 일찍 잠을 청했건만 이렇게 되면 좋은 컨디션은 물 건너갔다. 누운채로 천장을 본다. 거기도 사람의 눈동자가 보인다. 시력을 맞춰 다시 보니 그건 곰팡이 얼룩이었다.


'왜 이런 꿈을 자꾸 꾸는 걸까? 왜 하필 오늘 이 꿈을 꾼 걸까? 암튼 난 재수가 더럽게 없다'


이번 중간고사가 나한테는 아주 중요하다. 은주가 나를 받아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생일대의 시험대다. 은주는 공부 못하는 남친은 싫다고 했다. 최소한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석차를 받으면 사귀는 걸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은주는 내게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게 어딘가. 마음이 아주 없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벌떡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간다. 어차피 다시 잠들긴 글렀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고 시험에 임하자는 비장한 각오로 책상에 앉는다. 은주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아주 달콤하다.


눈을 떠 보니 방 안이 환하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다. 순간 등에 식은땀이 죽 흐른다. 핸드폰 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다. 8시에 중간고사 수학 시험이 시작이다.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튀어나온다. 아직 시간은 있다. 전속력 질주면 가능하다. 씻는 둥 마는 둥한 후 밥을 먹고 가라는 엄마를 뒤로하고 냅다 뛴다. 반지하 철재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간다. 대문을 박차고 나와 언덕 아래에 있는 정류장으로 향한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오지 않는다. 여기서 도박을 해야 한다. 큰길 정류장까지 뛰느냐, 마을버스를 조금 더 기다려 보느냐.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을 천성적으로 싫어한다. 기다리는 무언가가 제 때 내 앞에 나타나준 적이 없었다.


나는 일곱 번째 생일날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던 장난감 총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땅거미가 질 무렵부터 기다렸다. 밤이 되도록 아빠는 집에 오지 않았다. 연락도 되지 않았다. 이튿날도 아빠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 후로 아빠를 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빠의 소식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너무 기다려서 그래... 그래서 아빠가 못 온 거야...' 나는 나를 탓하고 있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다 내게서 멀어져 갔다.


은주만큼은 내게서 멀어지게 할 수 없다. 이 시험은 무조건 잘 봐야 한다. 나는 마을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뛰었다. 한 5백 미터쯤 뛰었을까. 마을버스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항상 이렇게 된다. 내가 기다리면 오지 않고, 마음을 접으면 내 옆을 스쳐간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다 보니 체념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란 놈은 원래 안 되는 거야. 신은 나를 싫어해.'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공부 머리도 없는 것 같았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시험지만 보면 머리가 텅 비어버린다. 그간 공부했던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것 하나쯤은 가지고 태어난다는데 내게는 그런 게 없다. 노래나 음악에도 소질이 없고, 그림이나 미술도 그러했다. 그렇다고 체육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공부는 더더욱 잘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그렇게 마음씨 착한 은주가 내 성적을 창피해할까. 내 성적을 누구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주변 사람 대부분은 안다. 거의 밑바닥을 기고 있다는 것을.


땀은 이미 온몸을 적셨다. 가까스로 큰길에 도착했는데 더 이상 뛸 힘이 없다. 저기 멀리 정류장에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보인다. 방금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있다. 다시 한번 젖 먹던 힘을 다해 뛴다. 하지만 원래 허약한 편인 내 몸은 의지를 따라주지 못했다. 뛰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고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버스가 이미 떠나버리고 난 후였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이 없다. 모두 그 버스를 타고 떠났다. 나 혼자 낙오된 느낌이다.


'아까 그 마을버스를 조금 더 기다렸더라면 이 버스를 놓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 마을버스를 탔어도 그 사이 무슨 일이던 일어났을 거다. 그래서 내가 이 버스를 결국 못 타게 했을 거다.'


이런 체념을 하며 여느 때처럼 거지 같은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다행히도 다음 버스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그래도 지각은 면할 수 없었다. 굳게 닫힌 교문 틈으로 학생부장 선생님이 보였다. 교문 앞에 쭈뼛쭈뼛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어슬렁 거리며 다가왔다.


첫 시험 시간의 반이 날아간 후에 교실에 도착했다. 선생님과 급우들은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젓거나 인상을 찌푸린다. 적막이 흐르는 교실 복도를 지나 뒤 쪽 내 자리로 가서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앞에 놓인 시험지를 들여다보았다. 해독 불가한 외계 문자들이 종이에 빼곡이 적혀 있다. 어째서 공부한 내용만 시험에 나오지 않는걸까. 눈물이 날 것 같다.


'넌 약속을 못 지켰어!'


머릿속에서 은주의 질책이 떠나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은 시험지에 머리를 쳐박고 나름 문제 풀기에 바쁘다. 멍하니 시험지를 바라보고 있는 나만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 같다. 은주에게 다가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내가 짜낼 수 있는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며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모두 헛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원래부터 나쁜 머리는 억지로 굴린다고 매끄럽게 굴러가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는 나는 이 교육 시스템의 낙오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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