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2)

계급

by Neutron

이건 그 꿈 때문이기도 하다. 머리에 이상한 장치를 뒤집어쓰고 동전을 움직이는 이상한 꿈을 꾸고 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안 좋은 일들이 생겼다. 원래 좋은 일이 잘 생기지 않는 내 삶이지만 그 꿈 이후에는 반드시 누군가와 멀어지거나 이별하는 아픈 일들이 생긴다. 동네에서 제일 친했던 민식이가 이사 가던 전날 밤에도, 아빠가 사라진 그 전날에도 같은 꿈을 꾸었다. 어제의 꿈은 누구를 보내는 꿈일까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힌다.


은주만큼은 떠나보낼 수가 없다. 은주는 내게 친절을 베풀어 준 유일한 아이였다. 작년 신입생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은주는 공부를 잘했고 학급 반장을 했다. 그녀의 얼굴은 우유를 부어 놓은 것 같았다. 그 희고 매끄럽게 잘 빚어진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감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비교되었고 차이가 났다. 하지만 은주는 못난 나를 항상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준비물을 깜빡했던 내게 자신의 것을 빌려주었다. 나를 괴롭히던 일진에 맞서 당당하게 내 편을 들어주었다. 내가 심한 감기 몸살로 결석했을 때 따뜻한 위로의 전화를 주었다. 어느새 그런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있는 용기를 모두 쥐어짜서 그녀에게 고백을 하였다.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음~ 이번 중간고사에서 15등 안에 들면 생각해 볼게~"


30명 중 15등을 목표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시험지는 외계어로 쓰여 있었고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시간 부족으로 아는 문제를 놓쳤고 지각이 한몫을 했다. 이렇게 되어서는 은주와 영영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나는 시험이 끝나고 교문 앞에서 은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무슨 변명을 하던지 기회를 한 번만 더 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했다.


멀리서 은주의 모습이 보인다. 여느 때와 같이 옆의 친구들과 밝게 웃고 떠드는 모습이 좋다. 그녀에게 근심과 걱정이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얼굴처럼 속마음도 희디 흰 사람일 거라 생각되었다. 2학년이 되어서 반이 갈렸지만 나는 한순간도 은주와 멀어져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졌다. 매일 그녀의 생각을 했다. 그녀와 결혼해서 오손도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몰래 웃음 짓곤 했다. 누군가를 마음속 깊이 좋아해 보기는 처음이다. 숫기 없는 내가 이성에게 용기를 내어 고백한 것도 처음이다. 그녀의 허락을 받기 위해 공부란 걸 열심히 해 본 것도 처음이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행복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고, 목표를 주었다.


은주는 내 앞을 지나가며 방긋 웃어 보였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민수야. 왜?"

"저기, 할 말이 있는데..."


은주는 같이 가던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내게 다가왔다.


"뭔데? 말해 봐."

"그게... 이번 시험 잘 보려고 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는데..."


은주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런데...?"

"목표하던 15등이 안될 것 같아. 다음 시험에는 진짜 자신 있는데..."


이 말을 왜 나한테 하지 하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던 은주는 이내 뭔가 생각난 듯 웃으며 말했다.


"우와~ 민수 대단하다. 다음 시험에서 전교 15등 할 자신이 있다니... 공부를 무지 열심히 했구나, 너."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 같다. 순간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렇게 얼어있는 내게 그녀는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내 남친이 되려면 적어도 나와 비슷한 레벨이 돼야겠지. 학생회 활동도 같이 했으면 좋겠고... 민수가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니 감동인걸."


반박할 수가 없는 말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친의 모습은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나는 가난하고 멍청하고 공부도 못하는 루저이기 때문이다. 부자이고 똑똑하며 전교 10등 안에 드는 그녀와 맞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이건 군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학생에게도, 직장인에게도, 장사꾼과 농부에게도 해당된다. 심지어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왕과 귀족의 시대를 지나 혁명이 이룬 시민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계급은 없어지지 않는다. 특히 이 나라에서 부와 학벌은 계급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된다. 좁게는 학교에서의 석차가 계급을 나눈다. 전교 10등 안에 드는 우등생과 반에서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낙오자로 나뉜다. 계급 간에는 사교는 물론 사랑도 금지되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행위가 계급에 의해 가로막힌다.


은주가 내게 잘해주었던 것은 학급 반장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던 까닭일 지도 모른다. 군대의 관심사병 같이 조금 모자란 녀석에게 오히려 더 애착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뭐든지 잘 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공부도, 친구나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모두 원만하게 잘 해내었다. 나에 대한 관심은 귀족이 하층민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다. 그건 이성 간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고백을 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잠시 거절할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상처 입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게 할 그럴듯한 구실을 생각해 낸 것이다. 내가 오해하여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주었다고 착각했던 게 한심할 뿐이다. 반에서도 바닥을 기는 놈이 경천동지 할 일이 벌어진다고 한들 전교 등수는 얻을 수 없다. 원래부터 각자에게 각인된 계급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은주는 내 계급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의 말은 오랫동안 동안 나를 달콤하게 감싸주었던 사탕껍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빌어먹을 꿈은 결국 은주도 떠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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