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3)

탁상시계

by Neutron

오랫동안 아빠를 원망했다. 처음에는 내 탓으로 돌렸다. 일곱 살 생일날 너무나 간절히 기다린 나 때문에 아빠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빈 자리는 엄마의 몫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이 엄마의 경제활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청소, 식당, 마트, 보헙 등 최저임금 수준의 일터를 전전했다. 그나마도 건강이 허락할 때 가능한 일들이다. 허리디스크로 고생 중인 엄마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당분간 소득 없이 살아야 했다. 갈수록 궁핍해지는 가계는 우리의 경제적 계급을 확정 지어줬다. 머리가 크고 나서 이 모든 불행이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임을 져야 할 가족을 남겨두고 사라진 가장을 원망했다. 아둔한 머리를 물려준 것도 원망의 대상이었다.


"네 아빠는 아주 똑똑한 분이셨어. 미국 나사(NASA)에서 근무하기도 하셨지. 한국에 돌아와서 좀 힘드셨지만... 너는 총명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거야. 늦둥이인 너를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엄마가 아빠의 편을 들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빠가 그랬을 리 없어. 내가 증거라고. 내가 총명했으면 왜 공부를 못하는데?"

"그건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지."

"노력, 노력. 나도 노력한다고! 하지만 원래 머리가 나빠서 안 되는 걸 어떡해! 나사는 무슨... 증거 있어?"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수행하신 거라 하셨어. 아빠를 못 믿니?"


엄마의 아빠에 대한 우상화가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한 없이 양보해서 나사 근무가 사실이라고 해도 가족을 경제적 밑바닥으로 내몬 가장으로서의 잘못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은주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지 못한 책임도 모두 아빠에게 돌렸다. 어쩌면 있지도 않은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공평하지 못한, 계급으로 철저히 구분된 사회에 대한.


아스팔트가 열을 뿜고 있다. 벌집처럼 매달려있는 에어컨 실외기들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있다. 여름 한가운데서 도시가 펄펄 끓고 있다. 기상 관측 이래 최고 더위라고 했다. 더위에 의한 사망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2015년의 여름은 도시를 태우고 있었다. 도시 빈민에게 이런 날씨는 지옥이다. 에어컨 없는 습한 반지하에서 선풍기만으로 날 수 있는 여름이 아니다. 빈부의 차이는 인간이 받는 육체적 고통의 차이와 비례한다.


방학을 맞은 또래 아이들은 시원한 학원과 독서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엄마가 일 나가고 없는 텅 빈 집 방구석에 앉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동자가 느껴지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동전만 한 빛이 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 빛이 벽지의 문양과 어울려 꼭 사람의 눈동자 같이 보였다. 이 동그란 빛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반대편을 둘러본다. 감옥 같은 방범창 좁은 창살 사이로 뜨거운 햇살이 밀려들어오고 있다. 그 아래 책상이 있고 그 위에 시침과 분침이 포개진 탁상시계가 놓여있다. 그 탁상시계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9시와 3시에 아주 작은 구멍이 나있다. 빛은 거기서 나오고 있었다.


그 시계로 말할 것 같으면 요즘은 찾기 어려운 골동품 수준의 태엽 시계다. 그나마도 초침을 움직이던 태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완전히 고장 난 물건이다. 디자인이 고풍스럽고 예뻐 관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장식품이었다. 고장 난 시계가 빛을 내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시계를 들고 천천히 살펴본다. 앞쪽은 멀쩡했지만 뒤쪽은 엉망이다. 태엽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텅 비어있고 반대편에서도 분침과 시침이 보인다. 빛이 나오는 9시와 3시 근처를 살펴본다. 이 두 부분에만 아주 작은 나사가 조여져 있다.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작은 상자들 같았다. '이걸 왜 지금 발견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작은 상자들은 시계와 어울리지 않았다. 드라이버를 가지고 와서 나사를 풀어보니 9 시 쪽 상자에는 새끼손톱만 한 칩 같은 것이 들어있고, 3 시 쪽 상자에는 돌돌 말린 작은 종이뭉치가 들어있다. 두 상자 안에는 초미니 발광다이오드가 흰 빛을 뿜고 있다. 종이를 펴보니 그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돋보기를 대야만 읽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글씨들이다. 이런 작은 종이에 이렇게 작은 글씨를 인쇄할 수 있는 프린터가 있는지 놀라웠다.


'기후 제어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나의 뇌파증폭 기술을 악용하려는 사람들을 피해 모든 연구자료를 양자칩에 기록해 두었다. 양자칩 데이터 로딩을 위해서는 전용리더기가 필요하다. 전용리더기는 이곳에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충청북도 제천시 xxx...'


누가 남긴 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이 작은 칩에 담아두었다는 내용인 것 같은데, 이게 왜 우리 집에 하필 이 시계에 들어있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나보다 더 신기해했다.


"어쩜, 이런 게 이 시계에 들어있었다니... 이 시계는 아빠가 아끼시던 거란다."


엄마는 그 종이에 적힌 주소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난 제천에 가 본 적도 없어. 아는 친척 중에 그 근처에 사는 사람도 없고. 이 쪽지는 혹시 아빠가 남기신 게 아닐까?"


엄마는 여전히 아빠가 나사에 근무했던 과학자라고 믿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 꿈속에서 나는 뇌파증폭기라고 불리는 이상한 장치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 번 꾸고 나면 내가 원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그 빌어먹을 꿈 말이다. 이 쪽지에 적힌 뇌파증폭기술과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꿈이었다. '뇌파증폭'이라는 단어를 오늘 처음 접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나는 이미 그 장치를 뇌파증폭기라고 알고 있었다. 난해한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 사람처럼 머리가 복잡하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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