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4)

제천

by Neutron

녹색 융단은 바람이 지휘하는 대로 춤을 춘다. 벼가 익어가고 있는 들판 사이를 가르며 제천행 기차 무궁화호가 곧게 뻗은 레일 위를 미끄러진다. 나는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서서히 지나가는 풍경에 취해있다. 여름방학 끝자락에 모험심이 발동했다. 원래 나란 놈은 뭘 하던 끈기가 없어서 야심 차게 시작한 일의 끝을 본 적이 없다. 호기심도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어서 '원래 그런 거지, 원래 이 세상은 그렇게 생겨먹은 거야.' 하며 만사에 순응했다. 공부에는 더더욱 취미가 없다. 뭔가를 외우기만 하면 금방 까먹는다. 영어 단어를 뼈에 새길 정도로 반복해서 되뇌어야 겨우 반 정도 기억에 남는다. 나머지 반은 나중에 봐도 처음 본 것 같다. 수학은 기호 자체가 무슨 의미인 지 모른다. 단순 사칙연산 이후의 과정은 내가 이해하기에 버겁다. 그래서 우등생은 애초에 포기했다. 이렇다 보니 학원이며 독서실을 쫓아다니는 여느 아이들과 달리 내게는 가야 할 곳이 없다. 그렇다고 집 책상머리와도 친하지 않은 나는 방학에도 방구석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심심하고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고장난 시계에서 이상한 불빛을 보았고 그 안에서 주소가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무언가를 발견했다.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이 사건만큼은 끝을 보고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여행 겸, 작은 종이에 적힌 주소지가 어떤 곳인지 찾아가 보기로 했다. 현실이 힘들면 미래라도 꿈꿀 수 있어야 사람이 버틴다. 나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고생으로 얼룩져 있다. 이 나라에서 유일한 신분 상승의 길인 명문대, 전문직 등은 나와 상관없는 단어다. 나는 커서도 일용직을 전전하며 남에게 굽신거리며 살아가야 할 팔자다. 이 또한 원래 그런 거니 받아들인다. 그래도 슬픈 건 사실이므로 그 시계를 핑계로 바람이라도 쐬고 나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주소를 큰 글씨로 옮겨 놓은 종이를 한 번 더 들여다본다. 아빠의 시계에서 나온 주소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아빠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아빠의 지인이 살고 있는 집일 수도 있다. 그러면 실종 후 행방에 대해 뭔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아빠가 오래전에 구입한 주택일지도 모른다. 그런 작은 재산이라도 지금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텐데.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가운데 기차는 제천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때린다.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8월 어느 날,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불을 뿜어대고 가림막이 되어줄 구름 한 점 없다. 역사를 빠져나와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 쭈뼛거리며 서 있으니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가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한다.


"학생이 무슨 일로 왔지?"

"안녕하세요. 이 주소지가 어딘지 여쭤보려구요."


나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아저씨는 초점이 잘 안 맞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그 글씨를 읽더니 말한다.


"여기는 버스 타고 한 참 더 들어가야 돼."


그리고는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리라는 안내까지 해 주었다.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도착한 목적지는 크고 멋들어진 소나무 정자가 입구에 버티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위에 띄엄띄엄 서있는 인가가 왠지 쓸쓸해 보인다. 마을로 조금 더 들어가자 ‘복덕방’ 간판이 붙은 빨간 지붕이 보인다. 복덕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다. 그 중 연신 부채질을 하며 장기 돌을 옮기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안녕하세요. 길 좀 여쭤보려구요. 13번지가 어디쯤 되나요?"


할아버지는 그 앞에서 같이 장기를 두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등 뒤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는데, 50세 중반쯤으로 보이는 약간 마른 체형의 남자다.


"우리 집인데, 왜 찾지?"


그는 시골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흰 피부를 갖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에서 지식이 느껴진다. 거기다 반듯한 서울말씨 등 여러모로 농촌 장기판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혹시 강영훈이라는 분을 아세요?"


아빠의 이름을 꺼내자 그 남자의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잠시 뜸을 들이다 앞에 있는 할아버지를 흘끗 보더니 건조하게 말한다.


"모르겠는데. 그게 누군데?"

“제 아빠예요. 혹시 아저씨는 최근에 그 집에 이사를 오셨나요?”

“아니. 오래됐지. 한 20년쯤…”


같이 장기 두던 할어버지가 거들었다.


“그 주소 잘못된 거 아니여? 이 마을은 좁아서 누가 어디 사는지 다 알어. 조금 친해지면 이름도 알 수 있지. 근데 여기 오래 살았어도 강영훈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네.”

"아, 그러세요. 실례했습니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다. 이래서는 무엇을 찾아보러 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렸을 때 헤어진 아빠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헛걸음이다. 듣고 보니 아빠는 여기에 온 적이 없는 것 같다. 필시 누가 장난으로 이 주소를 적어서 시계 안에 넣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허탈한 심정으로 복덕방을 나오려는데 그 중년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 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학생이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서 시원한 거라도 한 잔 하고 가지… 어르신. 간만에 외지 사람이 찾아와 줬는데 뭐라도 대접해서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기는 담에 또 두시죠. 이 판은 제가 졌습니다.”

.

그 남자는 내 앞에 다가와서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보더니 말한다.


"보아 하니 시내에서 온 거 같은데 차 시간도 남았고... 그 동안 우리집에서 더위 좀 식히고 가지."


사람에 경계심을 갖는 편이어서 평소같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제안이다. 그런데 왠지 자석에 이끌리듯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가는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를 데리고 복덕방 뒷골목을 지나 작은 단층집으로 걸어갔다. 열쇠로 대문을 여는 것을 보아 혼자 사는 것 같았다. ’낑‘ 녹슨 쇠붙이가 서로 긁히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대문 안에는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 안쪽에 20평이 채 안 돼 보이는 집이 있다. 그 현관에는 시골집에 어울리지 않게 도어락이 달려있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현관문이 열린다. 나는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움켜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민수지?“


갑자기 내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아저씨가 어떻게…”


그 남자는 나를 거실 소파로 안내하며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도 잘 계시지? 그러니까 몇 년 전이더라…맞다, 네가 일곱살때 마지막으로 봤으니 지금 열일곱이 됐겠구나.“

“저를 아세요?”

“물론이지. 너는 기억에 없을 지 모르지만…”


내 기억은 일곱살 생일날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상한 꿈을 꾸고 다음날 아빠가 사라진 기억이다. 그 이전 일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아빠의 얼굴을 직접 본 기억도 없다. 어린 나를 안고있는 사진 속 얼굴을 떠올릴 뿐이다.


“네가 어렸을 때 많이 놀아줬지.”


어딘가 익숙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 남자는 분명 내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말을 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아까는 왜 아빠를 모른다고 하셨어요?”

“그건… 얘기 하자면 길다.”


그 남자는 시원한 오렌지 쥬스를 내 앞에 놓으며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아빠와 나는 미국에서 함께 일했다... 우린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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