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9)

학교

by Neutron

개학을 하루 앞둔 밤 내 방에 누워 고장 난 탁상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이것저것 생각한다. 성진 아저씨 집에 다녀온 후로 이상하게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고 수많은 궁금증들이 동시에 생겨났다. 그 궁금증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정교한 것들이며 어떤 현상에 대한 원인과 그 원인이 발생하게 된 이유를 알고 싶은 욕구다. 지금껏 이런 욕구를 느껴본 적이 없다. '원래 그런 거지. 다 그렇지 뭐.' 하며 매사에 순응하는 편이었던 내가 '왜 그런 거지? 이유가 뭐지?' 하며 진실을 파고들고 있다. 거리를 지나가며 글씨가 쓰인 간판을 보면 파란색 페인트의 성분과 그 분자구조가 떠올려지고 흰색 아크릴 판 표면 분자와 어떠한 인력에 의해 서로 달라붙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빗방울이 왜 동그란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으면 왜 미지근해지는지, 뜨거운 커피잔을 불면 왜 식는지... 이 세상에는 궁금한 것투성이다. 그 궁금증은 물리적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나 역사, 정치에 대해서도 그런 궁금증은 계속된다.


결국에는 못 참고 인터넷을 뒤져 여러 설명들을 찾아본다. 납득이 될 때까지 찾고 찾는다. 그러면 어떤 현상에 대한 학위 논문에 다다른다. 그 학위 논문을 다 읽고서야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인터넷 정보에는 오류가 많다. 그래서 동네 도서관에 가본다.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 작가는 자신의 지식과 견해를 쏟아놓고 있다. 그 정보들은 정제되고 연마된 보석 같은 것들이다. 어느새 동네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읽고 있다. 신기하게도 책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한 시간도 안되어 완독이 가능하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진 의도나 주장하는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아빠가 내게 남긴 선물이란 게 이건가. 그동안 아둔한 머리로 살았던 건 내 건강을 위한 아빠의 배려였다. 지금 아빠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걱정이 든다. 예전과 비교해 지금 달라진 건 기억력이 좋아지고 논리적으로 원인을 파헤지는 힘을 가졌다는 것인데, 사실 이것들은 극강의 호기심이 작동하면 생겨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력과 논리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호기심이 없기 때문이다. 극강의 호기심은 집중력을 만들어내고 그 집중력은 인간의 사고 능력을 극대화한다. 내게 이런 능력이 생겨난 것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갑자기 커진 탓이다.


다음날 학교 교실에 앉아서 사회 수업을 듣는다.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내용이다. 선생님은 공동생산 공평분배의 사회주의보다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가 더 우월한 체제이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살아남았다고 설명한다. 나는 바로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순간 '이건 뭐지?' 하는 분위기다. 멍청한 루저, 열등생이 수업을 중지시키고 선생님에게 질문을 한다. 이것은 명백한 수업 방해다. 그러나 선생님 입장에서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들어온 질문을 무시할 수 없다. 선생님은 귀찮은 듯이 대꾸한다.


"뭐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몇 가지 사례만으로 그 체제가 열등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련이 붕괴된 이유는 체제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독재자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도 자본의 집중이 과잉생산과 소비력 저하로 이어져 결국에는 자본가도 파멸에 이르게 될 텐데, 정말 우월한 체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당황한 선생님이 정적을 깨고 일부러 침착하게 말한다.


"넌,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거다. 꼭 공부 못하는 놈들이 이상한 데 꽂혀서... 수업 분위기 흐리고 있어."


나는 정말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며칠 전에 읽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나름 사람을 위한 최선의 체제를 이야기했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반면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먼 등 자유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힘센 자들의 자유만을 이야기했다. 정말 인류를 위한 체제가 무엇인지 끝없는 호기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이런 것을 배울 수 없다. 아주 피상적인 정보들을 대단한 지식인 양 시험 문제로 내고 그것을 맞추면 우등한 사람, 못 맞추면 열등한 사람으로 편을 가른다. 그렇게 우등생이 된 사람은 이 사회의 권력을 쥐고 열등생들을 지배한다. 이런 판에서 전교 몇 등이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자기 생각 없이 그냥 짖으라면 짖고 뒹굴라면 뒹구는 애완견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착한 애완견일수록 우등생이 되고 이 사회의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애완견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수학 시간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다. 기호의 의미와 그 활용을 숙지하니 수학 문제 푸는 것이 재미있는 놀이 같다. 수학에는 이견이 없다. 서로 다른 주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맞다, 그르다'만 있을 뿐이다. 그동안 외계어로 보였던 수식과 문자들이 한없이 명백하게 이해된다. 수학이 이렇게 쉬운 것이었다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꼭 들어맞는 기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논리 속에 새로운 것은 없다. 논리의 확장만 있을 뿐이다.


과학 과목도 다르지 않았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은 철저하게 원인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왜?’라는 화두를 계속 던지며 발전해 왔다.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이만한 학문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학교 과정은 궁극의 ‘왜?’를 건너뛴다. 그냥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또 교과 과정 밖의 도서들을 읽는다.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하지만 과학만큼은 궁극의 ‘왜?’ 측면에서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 단지 인류가 지금까지 밝혀낸 사실과 주장 정도까지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성진 아저씨 집에 다녀온 지 두 달이 흘렀고 이제 중간고사 기간이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시험이다. 하지만 내게 시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은주의 허락을 받는 일도 그리 절실하지 않다. 내가 궁금한 건 도대체 어떤 문제들을 출제해서 사람을 구분 짓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할 특권을 가지게 될 정도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시험하고 평가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허무하게도, 정말 허무하게도 모든 문제들은 사람의 계급을 나눌 정도로 심도 있거나 의미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피상적 단순 지식을 묻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시험을 모두 마친 나는 허탈했다.


시험 결과가 발표되기 하루 전, 담임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너, 부정행위 한 거 아니야? 뭘 어떻게 한 거냐?”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문제에서 원하는 정답만 적었을 뿐입니다. 잘못된 문제도 있었고, 그게 정답인지 조금 더 고려해 볼 문제들도 많았지만.”


증거를 찾지 못하는 한 선생님의 의심은 추측으로 끝날뿐이다. 중간고사 성적이 발표되었다. 나는 하나도 틀린 문제없이 만점을 받았고 전교 1등을 했다. 학교는 뒤집어졌다. 반에서 바닥을 기던 멍청이 열등생이 갑자기 전교 1등이 된 것이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교에 퍼졌다. 모두 나를 흘끔거리며 훔쳐본다. 분명히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고 믿는 눈치다. 나에게는 그런 시선조차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아무것도 아닌 이런 유치한 시험에 목을 매는 아이들이 불쌍할 뿐이다.


어떤 아이들은 내 성취가 부러웠다. 하나둘씩 내게로 다가와서 친한 척을 한다. 그동안 나를 벌레 보듯 하던 우등생들도 다가와 간식을 건네며 무슨 참고서를 쓰느냐,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느냐를 묻는다. 그런 그들의 갑작스러운 전향이 역겨웠지만 생각해 보면 안쓰럽고 불쌍한 아이들이다. 등수를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하는, 자기들이 깔보며 무시하던 한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며 아부해야 하는, 그런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연민이 생긴다.


머리가 맑아져 모든 것이 명확해진 이후에도 그런 아이들을 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과연 아이들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이 뭘까,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 있을까. 하굣길,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교문으로 향한다. 교문을 통과하려는데 ‘민수야!’ 하며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운다. 돌아보니 은주가 환하게 웃고 있다. 여기 서서 나를 기다린 것 같다. 은주가 나를 기다리다니. 순간 달콤한 무엇이 속에서 꾸물거린다.


“민수야. 너 정말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거니?”


은주도 내 성적에 관심이 큰가 보다. 사람들은 나보다 내 성적에 더 관심이 많다. 그동안 나를 무시하던 우등생들이 갑자기 친근해질 때에는 그들이 역겨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주한테는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은주한테만은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 은주는 우물쭈물하는 내게 다정스럽게 말한다.


“내가 떡볶이 쏠게. 민수 시험 잘 본 거 축하하는 의미에서. “


우리는 학교 앞 분식집에 들어가 앉았다. 은주와 단둘이 작은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고 앉아있다니… 샴푸 냄새도 아닌 것이, 향수 냄새도 아닌 것이, 묘한 향기가 은주로부터 전해져 오자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주가 떡볶이 등을 주문하고 내게 말을 건넨다.


“네가 전교 1등 했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민수 너 대단하다.”

“고… 고마워.”


그녀의 칭찬이 정말 고마웠다. 어쩌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그때 은주의 얼굴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맘대로 나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버티는 내게 은주가 은밀히 말한다.


“그런데… 이 누나한테만 살짝 알려주면 안 돼?”

“뭘?”

“뭐긴 뭐야. 네 과외 선생님이지. 이 누나한테도 소개해주면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게. “

“과외 선생님이라니…?”

“정말 이럴래? 내가 그동안 널 얼마나 보호하고 돌봐줬는데. 그 정도 정보도 공유해 줄 수 없다는 거야?”


은주는 짐짓 토라진 표정을 하고 눈을 살짝 흘기는데 그 마저도 아름답다.


"반에서 15등 하는 것도 버거운 애가... 너 혼자 공부해서는 절대로 그 짧은 기간에 그렇게 될 수가 없어. 분명히 누군가 시험에 나올 문제를 꼭꼭 찍어줬을 거야. 이제 말해봐. 그 족집게 선생이 누군지."

"아무도 없어. 나 혼자 한 거야. 정말이야."


은주는 과거 신입생 때 나를 위해 해준 일들을 상기시키며 생색을 낸다. 준비물을 빌려준 일, 일진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나를 구해준 일, 아파서 결석했을 때 걱정해 준 일 등. 그리고는 그 과외선생 수업을 함께 듣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우리가 자연스레 더 친해질 수도 있고 사귈 수도 있다고 달콤한 말을 뿌려댄다.


"은주야, 정말이야. 그런 선생님은 없어."


은주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뀐다.


"나는 널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그래, 누가 또 그런 과외를 받으면 네 석차에 영향을 주겠지. 강한 경쟁자가 생기는 걸 사전에 막고 싶겠지. 아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근데, 우리는 좀 특별하잖아. 나도 네가 좋아지려고 하는데..."


그날 은주는 내 성적을 우러러보았고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한 건 나의 배경이었다. 밑바닥에서 하루 아침에 정상으로 탈바꿈한 나의 계급이었다. 그녀의 관심사에 나는 없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