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10)

초능력

by Neutron

은주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나도 네가 좋아지려고 하는데...' 이 말이 계속 맴돈다. 은주한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볼까. 내가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면 믿을까. 그 말을 믿는다고 해도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그녀는 내게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기를 절실히 바라는 것 같다. 주고 싶어도 줄 게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은주를 생각하며 집으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 때였다. 누군가 내 뒤를 밟는 느낌이다. 예전의 나 같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잠들어있던 모든 신경과 세포들이 다시 깨어나고 모든 신체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다. 문구점 앞에서 물건을 고르는 척하며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몰래 훔쳐본다. 한 남자의 그림자가 얼른 담벼락 뒤로 숨는다. 누군지 궁금해진 내가 그쪽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신기하게도 돌담 뒤에 숨은 그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제풀에 놀라 재빨리 시선을 거둔다. 헛것을 본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간다. 그 남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다. 나를 미행하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누가, 왜 나를 미행하는 걸까. 호기심이 생긴다.


세탁소가 있는 담 모퉁이를 돌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그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는다. 가려진 담 너머로 그 남자가 어디쯤 오는지 어렴풋이 보인다. 내가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을 자꾸 바꾸며 걸으니 그 남자는 나를 따라오기 바쁘다. 잠시 후 그 남자는 길을 잃었는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다. 그러더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뛰어간다. 나는 그 남자가 도달하게 될 골목길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섰다. 모퉁이를 돌다 가만히 서 있는 나와 마주친 그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남자는 50대 정도로 보이고 가을 늦더위에도 검은 가죽재킷을 입고 있다. 그는 놀라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재킷 왼쪽 안주머니로 쑤셔 넣는다. 내가 멍하니 서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안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손을 뺀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왜 저를 따라다니세요?"


그는 멋쩍게 웃으며 둘러댄다.


"그게... 나는... 네 아버지 친군데.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아빠는 돌아가신 지 한참 됐는데. 모르셨어요?"

"아... 그래... 언제 돌아가셨니?"

"한 십 년 전에요."

"그랬구나.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었는데..."


보고 싶은 친구가 죽었다는데 별 감흥이 없던 그 남자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번에 시험을 대단히 잘 봤다며? 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지 몰랐네."

"어떤 분이길래 제 뒷조사도 하고 다니세요?"


그는 씩 웃으며 말한다.


"네 아버지만큼 네게도 관심이 많은 아저씨란다. 나랑 같이 가서 얘기 좀 더 하겠니? 네 엄마도 거기 있단다."


그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고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엄마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나를 미행하고 말하는 투로 봐서 호의적인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 빨리 집에 가서 엄마가 무사한 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버티자 그는 힘을 더 준다.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센 손아귀 힘을 가졌다. 너무 아파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가 내 손목을 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악!"


갑자기 그는 비명을 질렀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점점 뒤로 젖혀진다. 마침내 꺾어져 똑하고 부러진다. 그는 놀랍고 아파서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너... 이거... 어떻게 한 거냐..."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냅다 뛰었다. 한참을 뛰어 집으로 들어가 엄마를 불렀으나 집안 어디에도 없다. 마트 계산대 오전반이라 엄마가 지금 집에 있어야 한다. 그 남자 말대로 납치된 게 아닐까.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데 현관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온다.


"아들, 벌써 왔니? 잠깐 장 보러 간 사이에 왔구나."


엄마는 장바구니 한가득 채소 등 반찬거리를 들고 있다. 본인이 일하는 마트는 비싸다며 굳이 재래시장을 찾아다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엄마, 우리가 지금 좀 위험한 거 같아."

"그게 무슨 말이니?"

"아빠를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알아듣게 좀 얘기해 봐. 네 아빠는 실종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누가 아빠를 찾아다닌다는 거니?"


엄마는 한국에서 아빠와 처음 만났다. 아빠가 미국에서 도망쳐 한국으로 들어온 지 3년 정도 지나고 나서다. 엄마는 아빠가 미국 나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연구 내용과 CIA와의 관계 등 자세한 건 몰랐다. 나는 그동안 성진 아저씨와의 만남을 숨기고 있었다. 엄마에게는 바람 좀 쐴 겸 여행을 다녀온다고 하고 제천행 기차를 탔다. 물론 그 후에 내 몸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노트와 연필을 가져왔다. 성진 아저씨를 만난 일과 그에게서 들은 아빠에 관한 이야기 들을 글로 써서 엄마에게 보여 줬다. 집 안에도 정보국 사람들이 심어 놓은 도청장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는 조용히 보더니 혼잣말로 '야속한 사람'을 되뇌고 눈물을 훔친다.


'성진씨는 지금 어디에 있니? 한 번 만나보고 싶구나.'


엄마가 노트에 글을 적어 물어본다. 성진 아저씨는 자신도 추적의 대상이므로 우리가 만나는 것이 위험하다고 했다. 우리 통화기록이 모두 정보국에 넘어가고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아빠와 연락하는 그 어떤 낌새라도 보이면 그들이 바로 출동할 거라고 했다. 내가 다시 글을 써 답했다.


'아저씨를 만나러 가더라도 아주 조심해야 돼.'


그들은 우리 가족을 모니터링하던 중 내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보이자 행동을 개시한 것 같다. 바닥을 기던 놈이 전교 1등을 한 건 아빠를 만나 어떤 능력을 전수받은 거라고 추측할 법했다. 그래서 우리를 인질로 아빠를 끌어내려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와 엄마가 쥐도 새도 모르게 골방으로 끌려가 어떤 고문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종이에 글을 썼다.


'잠시 여기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엄마가 고개를 끄덕하고 간단히 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집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향했다. 나는 대전 외갓집에 가자고 말했지만 엄마는 성진 아저씨를 보러가고 싶다고 했다. 마침내 서울역으로 가서 제천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뒤를 밟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감각을 끌어올리고 걷는다. 아니나 다를까 몇 명이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모두 세 명이다. 아까 나를 쫒다 손가락이 부러진 남자도 끼어 있다. 2~30m 정도 거리를 두고 우리를 따라오는 그들이 가려진 인파에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들의 옷 속을 들여다보니 모두 권총을 차고 있다. 정보국 요원인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왜 한국 정보국 요원이 우리를 미행하는 걸까? 이들이 CIA와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인가? 물론 미국이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안 들어줄 수 없는 관계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자국민 보호가 우선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힘없는 나라에 사는 걸 원망하며 이들을 어떻게 따돌릴까 생각한다.


우선 우리를 찍고 있는 cctv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거의 30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cctv와 차량 블랙박스 때문에 서울 시내에서 동선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주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수증기를 응축시켜 한데 모았다. cctv를 쳐다보고 응축시킨 물방울들을 장비 내부로 스며들게 했다. 그 물방울들이 전자회로에 숏을 일으켜 전원을 차단하는 상상을 했다. 사방에서 나를 비추는 모든 카메라와 자동차 블랙박스에 같은 상상을 하며 뇌파를 보냈다. 주변 모든 cctv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차량 안의 블랙박스 화면이 꺼지고 스멀스멀 연기가 난다. 걸어가면서 계속 그 작업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나가는 자리에서만 cctv가 고장 나면 그것 자체가 우리의 동선을 알리는 길이 된다. 범위를 최대한 넓힐 필요가 있다.


나는 조금 더 큰 그림을 상상했다. 더 많은 수증기들을 모은다. 그 수증기들을 모아 수많은 작은 물방울들로 만든다. 그 수많은 작은 물방울들은 안개가 되어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두꺼운 안개가 서울 시내 일부를 뒤덮었다. 안개의 농도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짙다. 가시거리가 5m도 안된다. 대낮에 깊은 어둠이 찾아왔다. 갑자기 거리를 뒤덮은 안갯속에 사람들이 당황한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주변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정보국 요원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참을 걸어서 안개를 빠져나온 뒤 나는 그 물방울들을 다시 증발시켰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거리는 다시 환해졌다. 요원들을 따돌린 우리는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 후로는 별 탈 없이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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