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공태양(22)

부도

by Neutron

한 달여가 더 흘렀다. 견디기 어렵던 폭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들었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붉게 변한 참나무 이파리들을 아침저녁으로 흔들어댄다. 누나의 가게는 여느 때와 같이 점심을 먹으러 온 공장 손님들로 붐빈다. 나도 그 사이에서 국밥을 맛있게 비우고 있었다. 김반장은 내게 선반 초벌 가공을 맡겼다. 여러 종류의 핀(Pin)을 여러 직경으로 가공하는 일이다. 공장 허드렛일을 벗어나 가공기술을 배우는 단계에 진입했다. 선반에 공구와 원소재를 끼우고 치수를 세팅하고 금속을 깎아내는 작업이 보기보다 재미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활력도 생기고 배도 많이 고프다. 두 공기째 밥을 말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매일 도시락을 싸 오느라 점심시간에도 공장에 있던 조립팀 권 씨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온다.


"김반장님, 큰일 났어요."


국밥 그룻에 코를 박고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김반장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기계고 자재고 모두 가져가려고 해요."


김반장이 일어나자 모두 그를 따라 공장으로 향했다. '공무'라고 적힌 차량이 정문에 서 있고 공장 안쪽에는 사람들이 모든 회사 물품에 빨간색 압류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그들 틈에 파란색 제복을 입은 경찰도 보인다. 김반장이 그 사람들을 말리며 묻는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사장님 허락도 없이 이러면 안 됩니다."

"여기 사장은 벌써 튀었어요. 아저씨들도 몰랐나 보네."


법원 집행관들과 함께 온 경찰이 잠깐 설명을 하는데, 사장은 부도를 내고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민사집행법 제246조에 의거, 지금 이 시각 이후로 압류표시물이 붙은 물품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형법 제140조 공문서 등의 부착, 표시 효용 손상죄 등의 적용을 받아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함께 온 경찰이 기계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김반장이 못 믿겠다는 듯 경찰에게 따졌다.


"부도라니요? 그동안 공장이 얼마나 잘 돌아갔고 매출이 얼마나 크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부도라니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나중에 사장이 나타나면 직접 물어보세요. 어쨌든 만기 도래한 어음을 갚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횡령, 배임에 대해서도 조사 중입니다."


회사의 제품이 잘 팔리고 매출이 성장하는 것과 별개로 재무와 돈의 흐름을 책임지는 경영진의 실수 또는 악의로 회사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례는 많다. 특히 경영 시스템이 완전하지 못한 중소기업에서 그런 상황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이런 경우 양심적인 사장이라면 직원들의 월급과 퇴직금을 우선 챙겨주고 자신이 모든 법적 도의적 책임을 진다. 그러나 우리의 사장은 한마디 언질도 없이 모든 뒷감당을 직원들에게 떠 넘기고 잠적했다. 김반장이 회사와 직원들을 위해 개인적 수모를 무릅쓰고 잘못된 설계를 바로잡은 희생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공장이 문을 닫으면 직원들의 생계도 문제지만 누나의 가게도 타격을 입는다. 외진 마을에서 누나 가게의 손님이 되어줄 사람은 공장 직원들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법원 사람들과 경찰이 돌아간 후 우리는 사무동 회의실에 모였다. 생산직뿐 아니라 사무직도 모두 모였는데 대금 출납을 담당하는 경애씨만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는데 여기서 실업자가 되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지 막막합니다."

"노모 병원비가 솔찮이 들어가는데 큰일이네요."

"우리 네 가족도 어찌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직원들이 푸념을 늘어놓는 와중에 사무직 중 품질 부서에 근무하는 남 과장이 제안을 한다.


"우선, 회사 자산이 얼마나 남았는지 파악해야 해요. 공장 물건들에는 모두 빨간딱지가 붙었으니 그 외에 뭐가 남았는지 찾아봐야 합니다. 그래야 이번 달 월급이라도 챙겨서 나갈 수 있어요."

"회사 자금 관련한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던 경애씨가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지... 혹시 미리 알고 자기 몫만 빼돌린 거 아닐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 가설이 설득력 있네요.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어린 아가씨가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경애씨는 상고를 졸업하고 작년부터 이 회사의 경리 일을 도맡아 해오던 직원이다. 부끄러움이 많고 순진해 보여서 이런 횡령 범죄를 저지르는 게 상상이 안 됐다. 그녀의 업무란 것이 월급 전송이나 대금 결제는 인터넷 뱅킹으로 하면 되고 어음 처리를 위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읍내 은행을 들르는 것이 다여서,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게 이상할 만했다. 직원들은 저마다 경애씨에 대해 한 마디씩 해댔다.


"평소에 말도 없고 사무실에도 있는 듯 없는 듯하더니 음흉스럽기 짝이 없네."

"순진해 보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니까요..."

"맞아. 사기꾼은 대부분 호감형이거나 순진해 보이는 사람이지."


경애씨는 이미 음흉한 사기꾼이 되어있었다. 그들에게는 이 황당한 상황을 책임 질 비난의 대상이 필요했다. 그 대상이 진짜 범죄자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래야만 그들이 뭉칠 수 있고 믿기 싫은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경애씨가 양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낑낑대며 사무동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녀를 발견한 남 과장이 바로 뛰어 나가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서 회의실로 끌고 들어온다.


"경애씨! 여기 직원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요."


그녀는 무슨 영문인 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다.


"뭐...를요?"

"회사돈 어디다 빼돌렸어요?"

"무슨 회사돈이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사장이 부도낼 거 미리 알고 자기 몫만 빼돌린 거 모를 줄 알아?"


수십 명의 눈이 그녀를 노려보자 그녀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발갛게 상기되었다.


"이건 뭐야? 빼돌리려는 회사 귀중품 아니야?"


남 과장이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낚아채서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그 순간 회의실은 정적에 싸였다.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은 인스턴트커피와 과자, 볼펜과 클립, 스테이플러 등 간식과 사무용품이 전부였다.


"마침 회사 경비가 남아서 이것저것 사 오느라 늦었어요. 버스가 하도 안 와서... 무슨 일이 있나요?"


경애씨는 멀리 읍내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직원들을 위한 물품을 구매해 온 것이다. 무거운 것들을 들고 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이미 땀범벅이 되어있던 그녀였다. 그곳에 모인 모두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들이 함부로 행한 마녀사냥을 후회했다.


"미안해요, 경애 씨. 사장과 한 패인 줄 알고."


남 과장이 사과를 했으나 모두는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침울한 적막을 깨고 여태까지 생각에 잠겼던 김반장이 입을 열었다.


"먼저 부도난 어음이 얼마짜리고 어디에서 온 건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사장이 직원들 몰래 다른 목적으로 차입을 한 건지, 회사 물품 대금으로 발행한 건지 조사한 후에 채권자를 찾아가서 사정을 해 보는 일이 남았습니다. 가압류를 해제하고 공장을 돌려서 대금을 갚을 수만 있으면 회사를 정상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장이 없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사장은 대표이사고 법적인 주인일 뿐 이 회사의 실제 주인은 우리입니다. 법적 주인이 권리를 포기했으므로 실제 주인인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의지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 공장이 계속 돌아가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지 않나요?"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렇다고 일제히 대답한다.


"그럼 됐습니다. 지금부터는 누구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공장 정상화에만 집중합시다. 여러분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순서대로 해야 할 일들을 나눠보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사무직 중 한 명이 이의를 제기한다.


"김반장님은 생산 현장에만 계셨는데 회사 경영 관련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 재무에 대해서 뭘 알고나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은근히 무시하는 말투다. 김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회사 경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누가 앞장서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실 분 있나요?"


그 말에는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김반장은 주위를 쓱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회사 경영진이 모두 사라졌고 또 아무도 나서는 분이 없습니다. 상황이 급하므로 우선 저의 계획을 진행하고 이 방향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면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반장은 각자가 해야 할 일들을 분배해 주었다. 영업 부서는 만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어음이 없는지 확인하고 협력 업체를 찾아가 채무 유예를 사정해 보도록 했다. 또한 회사에서 받아야 할 납품 대금 총 수령액과 수금 일정을 꼼꼼히 체크하도록 했다. 경애씨에게는 문제의 어음이 어디서 발행되었는지 금액이 얼마인지 확인하도록 했다. 자신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나서겠다고 한다. 생산직 반장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명확하고 구체적인 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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